김 재 성 교수
김 재 성 교수

“가츠라 태프트 조약”을 일본과 체결한 미국 정부의 입장과는 다른 것이었다. 알렌은 1905년에 미국으로 소환되었다. 그는 일본의 침략 야욕에 제동을 걸고자 한 것이었지만, 미국의 이권쟁탈전에서 그의 견해는 무시를 당했다. 
공사의 직책에서 물러난 후, 알렌은 미국에 귀국해서도 의사로서 활동하다가 1932년 12월 11일, 오하이오주, 톨리도에서 사망하였다. 21년간 한반도에 머무는 동안에, 고종황제로부터 태극훈장을 수여받았다. 아내 프란세스 앤과의 사이에 2남, 호레이스 에단과 마우리스를 두었다 (Horace Ethan and Maurice). 

10.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열매들

알렌의 헌신으로 문을 열게 된 한반도에서 장로교회의 언더우드와 감리교회의 아펜젤러가 복음사역의 토대가 되는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통해서 젊은이들을 지성인으로 배출해내는 혁혁한 공헌을 남겼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출생했다. 그의 나이 13세 때 미국으로 이민하였고, 1880년 뉴욕대학을 졸업하고 뉴저지에 있는 “뉴 브른스위크 신학교”(New Brunswick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했다. 그가 신학교에 재학하던 시기에 “전국신학교 연합회”가 창립되어서, 프린스턴 신학교, 하트포트 신학교 등에서 큰 대회가 열렸는데, 이 모임을 통해서 큰 감동을 받고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1883년 신학생들의 모임에서 알버트 울트만스 박사가, “누가 조선에 복음을 들고 갈 것인가?”라는 도전을 듣고서 처음으로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천3백만 민족이 복음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채 가난과 질병과 학대 속에서 쓰러져 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드디어 문호를 열렸고, 주께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호소를 접하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오래 전부터 동양권의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미 인도로 작정하고 있던 중에 마음을 바꿨다.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고자 기도하던 선교부 총부 엘린우드 목사의 도움으로  1884년 7월 28일 언더우드는 장로교 선교본부에서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러는 1858년 2월 6일 미국 펜실베니아 주 서더튼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독일계 스위스인으로 개혁교회 소속이었고, 어머니도 독일계  메노나이트파 신자로서 철저한 평화주의, 무저항주의를 지키는 재세례파에 속해 있었다. 18세 때에 장로교 집회에서 거듭남의 체험을 하였다. 한국인을 위해 목포 앞 바다에서 조난사고로 순교했을 때 그의 나이 44세였다. 언더우드와 함께 제물포에 1885년 4월 5일에 입국하였다가 공관의 허락이 없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6월에 재입국하였다. 한국에서 태어난 딸 알리스 레베카 아펜셀러는 어머니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랭캐스터 쉬픈 고등학교를 마치고, 1909년 매사추세츠 웰슬리 대학에 진학한 후, 뉴욕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화학당의 교장으로 오랫동안 수고하다가, 김활란 박사에게 물려주었다. 양화진에 있는 그녀의 묘비에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노라”고 쓰여있다.  

아펜셀러와 함께 한국 선교의 초기에 온 스크랜톤 (William B. Scranton)은 1856년 5월 29일 출생이다, 아펜셀러보다 두 살이 많았고, 언더우드보다는 3살이 많았다. 예일대학교를 졸업한 후 뉴욕 의과대학을 마치고, 오하이오 주 클리브랜드에서 의사 활동하였다. 스크랜톤이 1885년 4월 말에 입국하였고, 조금 뒤에 그의 아내와  어머니 메리가 입국했다. 1885년 6월 20일에 아펜셀러 목사와 부인, 스크렌톤 목사와 부인과 어머니, 존 헬렌 선교사 부부가 조선에 입국하였고, 이들은 조선 땅에서 6월 25일 오후 8시 알렌의 집에서 첫 정식 주일예배를 드렸다. 그 후로 1970년대까지 약 1,700 여명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왔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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