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헌 철 목사
서 헌 철 목사

불교계 학자들은 말한다. 유럽에서는 이미 신은 죽었다. 아니 애초에 신은 없었다. 라고 조소하며 신을 믿는 것에 대한 열광은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기독교인들은 죽은 후의 사후세계를 동경하면서도 이 세상에서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는 미신적인 생활에 젖어 있다는 것이다. - 또한 기독교는 신이 영혼을 살리신다고 함으로 수동적이나, 불교는 능동적이란다(2008. 10. 25. 불교 TV. 학술세미나).

과연 그럴까? 얼마간의 세월이 지난 이야기라 하지만 지금까지도 달라진 것은 없이 도리어 그러한 비난의 생각 등은 강도는 더 심화 되고있지 않을까?

기독교가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꼭 그렇게 기독교를 폄훼할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 아니 꼭 그렇게 말한다면 불교 인들은 영혼에 대하여, 하루살이들과 같이 자기 스스로 발생했다 사라지는 것(자생적)을 능동적으로 본다는 것인가? 희생이나 봉사의 개념 자체가 없는 ‘석존’의 가르침에 기초를 두고 있는 불교 인들이 희생과 봉사의 삶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보다 능동적이란 말인가? 유한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창조주)을 믿는 것이 그리도 거슬린단 말인가? 그러나 마음이 아팠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만 하는가? 자성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을 거부하고 그들의 말대로라면 이 세상에 유토피아의 건설을 요청한 제자(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로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마16:23)”라고 단호하게 책망하셨음을 살펴 보기길 바란다.

그러나 우리가 CEO적 성공과 출세를 제 1계명으로 섬기는 추세가 늘어가고 있기에 그들로부터 이 세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한 기도들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는 것은 아닌가? 즉 그들의 말 대로 물신을 섬기는데 많은 교인이 미혹되어가고 있는 현상에 대하여 비판적인 생각의 표현은 아닐까?

물론 자기의 주관적인 생각만 앞세우다 보면 기독교의 진정성을 이해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 한 예를 들어보자 “어느 두 부인이 가문의 자랑을 하기에 이르렀다. 한 부인이 우리 가문은 영광스럽게도 거슬러 올라가면 ‘알렉산더 대왕’에 까지 이르지요 라고 자랑을 하니, 다른 한 부인은 나는 잘 모르겠는데요 우리 가문은 노아 홍수 때에 다 떠내려가서 알 수가 없답니다.”라고 답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비유가 적절할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기의 생각만을 앞세우다 보면 웃지 못할 이야기를 낳게 되지 않을까? 그러므로 자신들의 우월함을 들어내기보다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종교가 과연 생명을 구원하는 직접적인 요인은 있을까? 하는 질문을 먼저 해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생각의 관점을 달리해 보기 바란다. 다중의 사람들이 ‘사머니즘(shamanism)’이라는 전통적 문화의 배경 속에 살아온 것을 떨쳐내지 못하는 이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신앙의 정체성을 굳게 붙잡고 살아가는 이들이 엄존하므로 비판만을 가하지 않길 바란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8:7-8).

한국장로교신학 연구원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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