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재 성 교수
김 재 성 교수

외국에서 한국을 찾아온 신학자들로부터, 혹은 필자가 해외에서 모이는 집회에 참석했을 때에, 한국 개혁주의 교회를 형성하고 있는 핵심적인 신학에 대해서 종종 질문을 받았다. 과연 우리 한국교회, 특히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장로교회는 어떤 신앙을 강조하고 있는지? 그 뿌리는 과연 누구인지? 한국 교회의 신앙 형성과정에는 과연 어떤 특징이 있는가? 여러 질문을 받아보았다. 그럴 때마다, 지난 날 한국교회를 이끌어나갔던 분들에 대해서 되돌아 보게 된다. 더구나, 한국 교회가 혼돈을 거듭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개혁주의 신앙의 유산을 점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우리가 외국의 선교사들에게서 복음을 들었고 신학을 배웠으므로, 한국에는 전혀 신학사상이나 신학적 체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자기 비하이다. 비록 어리고 부족하지만, 그 나름대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성경을 읽고, 설교했으며, 교회의 사회적 입장을 펼쳐왔었다. 한국교회의 역사가 150년이 되어 가는데도 한국의 신학이 없다는 비난을 하는 자들이 있다. 한국에 신학사상이 없으며, 아주 어린 아이 수준에 불과하다는 비평에 대해서 필자는 동의할 수 없다. 이런 비난들은 매우 편협한 시각으로 왜곡된 주장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피선교지 국가로서 한국교회는 서서히 성경을 깨닫고 터득하면서 개혁주의 신학사상을 형성하였다. 복음이 들어온 이후로 성도들의 가슴 속에서 형성되어져 내려온 한국교회의 신앙 사상의 중요한 부분들이 형성되기 까지는 매우 혹독하고 독특한 시련들이 수반되었다. 한국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감격적으로 회개하는 운동을 드라마틱하게 체험했다. 어느 시기에 이르기까지 서양신학자들처럼 날카롭게 분석하는 글을 작성하여 신학사상을 정리하지는 못하였을지라도, 분명히 한국의 개혁신학은 서서히 형성되고 뼈대를 만들어 나왔다.

복음이 한반도에서 소개된 후, 기독교는 한국 역사와 사회 속에 엄청난 변화와 발전의 원동력을 제공하여왔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한국교회는 단지 한반도 안에서만 새 역사를 이룩한 것이 아니라,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무신론에 사로잡힌 현대 문명의 도전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주도하는 거대한 해체주의 흐름 속에서 위태로운 처지에 놓였다. 복음을 받았던 교회에서 이제는 나눠주는 교회로 성장한 한국교회가 어떤 신앙을 물려받았던가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아야 할 때이다. 한국 교회는 전세계 개신교의 역사에서 놀라운 평가를 받고 있고, 한국의 국력 신장과 함께 전세계로 영향력을 넓게 발휘였다. 특히 한국의 장로교회는 전체 한국교회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서 전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 왔다. 

무엇보다도, 초기 한국 교회의 신앙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특히 한국에 있는 모든 교회는 초기 선교사들의 확고한 신학사상과 그들에게 영향을 입은 평양신학교 출신 목회자들이 다져놓은 신앙의 기초가 무엇이었던가를 파악해야만 한다. 

1.  평양신학교가 초석을 놓다

지금 한국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초기 목회자들과 교회지도자들이 터득한 신앙유산이 흐르고 있다. 이들 모두의 스승은 1901년 평양에 한국 최초 신학교를 세운 모펫 선교사(Samuel Austin Moffet, 1864-1936)다. 당시 한문으로 표기하던 이름은 “마포삼열”이라고 했다.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이 가장 존경하고 따랐던 지도자는 새뮤얼 모펫 선교사였다. 

단적으로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초기 한국 교회 성도들은 거의 영문도 모른 채 서양선교사들을 “모 목사”라고 불렀다.

“모 목사는 평양의 선구자적인 선교사이다. 그는 60여개의 시골 교회의 목사이다. 그는 서울에서 의주까지 오르락내리락하며 교회를 돌보았다. 그의 열정적인 선교활동 덕분에 사람들 사이에서 모 목사’라는 이름은     모든 선교사를     칭하는 일반 용어가 되어버렸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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