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죄부를 파는 종교개혁당시의 가톨릭교회의 모습.
면죄부를 파는 종교개혁당시의 가톨릭교회의 모습.

10월 마지막 주간은 종교개혁주간이고, 31일은 종교개혁주일이다. 루터가 인간을 매개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반기를 들고, 종교개혁을 단행한지 504년이 됐다.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점검하고, 교회개혁의 의지를 보였다. 이는 허울 좋은 말에 불과 했고, 오히려 종교개혁의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은혜로만을 외치다가 값싼 은혜의 신앙문화를 뿌리 내리게 했다.

사실 한국교회는 믿음과 은혜를 내세워 개혁해야 할 교회가 개혁하지 못하고, 교회성장이란 번영신학에 집착해 왔다. 특히 신자유주의의 폐해인 경제에 종교를 종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제 교인들의 믿음의 척도는 헌금의 액수가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마지막 거처인 집까지 빼앗아 교회당의 첨탑을 높이는데 경쟁을 벌였다. 종교가 국민들의 도덕적, 윤리적, 경제적 가치를 결정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믿음이 아닌 돈으로 구원받는 시대가 됐다.

그렇다 보니 오늘 한국교회와 사회는 성직자들에 의해 혼란과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나, 일반국민 모두의 입에서는 교회가 교회다워야 하고, 교회가 먼저 개혁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신종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상황서 기독교의 이름을 내건 일부 종파가 국민들의 곤궁한 삶을 외면하고, 코로나19 집단감염으로 사회적, 교회적 혼란을 야기한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물인 인간의 생명을 하찮게 여긴 결과이다.

이것은 기성교회도 마찬가지였다. 교회가 코로나19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국민들의 생명을 생각하기 보다는 대면예배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대면예배 자제 협조를 요청하는 국가와 맞섰다. 대면예배를 동조하던 목사가 죽었고, 장로가 죽었고, 교인이 죽었다. 교회가 인간의 생명을 하찮게 여긴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교회 간의 갈등과 반목은 씻을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방역수칙을 따르는 교회를 향해 좌파로 매도했다.

이것은 분명 성서의 가르침에서 이탈한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다. 성경의 희생과 사랑도 아니다.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서,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인 예수 그리스도의 길도 아니다. 일부 교회와 이단종파에서의 코로나19 집단감염은 사회적 혼란과 종교적 혼란만을 야기시켰다.

그 중심에 교회를 이끄는 종교지도자들이 있었다는데 안타깝다. 여기에다 한국교회는 교리적 교파적 갈등을 일으키며, 분열과 갈등이 계속되었다. 한 목회자의 공로와 희생으로 모처럼 만들어진 하나의 보수연합기관에 대한 공감대와 3개로 분열된 보수연합단체 통합의 기회마저 날아 가버렸다. 통합의 기회는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3개의 보수연합단체가 통합하면, 3-5개로 분열된다는 말도 나온다. 희생과 양보와 손해 없이 통합은 없다.

희생과 양보없는 통합은 없다

오늘 한국교회는 국민의 정치적, 이념적 갈등의 중심에 서 있다. 개신교의 지나친 편향된 이념은 사회분열을 부추기고, 정치적 갈등을 일으켜 왔고, 이것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여기에다 교리적 갈등, 교파적 갈등은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혼란을 가중시키고, 화합과 연합, 일치의 틀을 깨고 있다. 한마디로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보수를 외치다가 보수주의에 떨어지고 말았다. 교회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과 다른 교회를 찾아가 시위를 벌이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한국교회가 한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종교개혁 이후 유럽사회는 개신교들 사이의 교리적, 교파적 갈등과 대립으로 인해 분열이 심각했다. 중세교회에서 일어난 교리적, 사회적 갈등이 오늘 한국교회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교리적, 교파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허버트를 비롯한 흄, 홉즈, 스미스 등과 같은 평신도신학자들은 종교의 뿌리를 찾는 이신론을 주장했다. 이들은 종교를 계시나, 교파의 범주로 해석하지 않았다.

합리적이면서 이성적으로 해석해, 교파간의 갈등을 해소하려고 했다. 오늘 이웃교회, 이웃교단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교리적 갈등을 일으켜 교회와 사회적 혼란을 일으키는 한국교회가 가야 할 길이 아닌가(?) 이신론은, 신의 본질을 이성적, 합리적으로 해명하는 것과 함께 신의 세계를 규정하는 것이었다. 이신론의 대표주자인 허버트는 인간의 삶 공동체가 새래적으로 있는 것, 민족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종교적 진술로부터 오는 원종교의 뿌리를 찾는데 중점을 두었다.

이들은 종교적 진리를 어떤 초월적인 계시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원종교를 이성적, 합리적으로 해석, 다양성을 승인하는 것에서, 피차간에 조화를 이루어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느 민족이나, 갖고 있는 공통적, 종교적 진술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늘 일부 목회자들이 성부, 성자, 성령을 부인하지 않으면, 이단으로 규정 할 수 없다는 주장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오늘날 이단 역시 기성교회에서 사용하는 성경과 찬송을 부르며, 같은 신앙고백을 한다. 이들 또한 성부, 성자, 성령은 한분이시나, 구별된다고 교육한다. 한 하나님을 믿으며,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한국교회는 분열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래서 일부 목회자는 한국교회는 이단의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을 팔아 장사하는 사이비가 문제이다고 말한다. 모두가 머리가 되겠다고 교단을 분열시킨다. 금년 가을 장로교 총회서만도 예장측을 비롯한 중앙총회, 호헌총회가 분열의 아픔을 겪었다. 한마디로 오늘 한국교회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기득권자로 변질됐다.

그렇다보니 한국교회는 교단 간, 교파 간, 교회 간에 갈등에 휩싸였다. 분규가 일어난 교회는 교인들이 드린 하나님의 헌금이 상당액이 소송비용으로 빠져 나가고 있다. 한편에서는 변호사만 좋은 일을 시킨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심지어 법원의 결정으로 변호사가 단체장, 교단장을 맡는 경우도 한국교회 안에서 속출하고 있다. 현재 분쟁중인 교단도 많다. 이런 사이에서 교단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목사들에 의해 이단이 만들어진다.

교회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타락한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교회는 자신들이 만든 교리와 제도에서 이탈하면, 이단으로 규정된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신자본주의경제체제의 악인 맘몬에 취해, 돈에 취에 하나님나라의 척도, 믿음의 척도를 헌금의 액수로 결정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경제에 종속됐다. 이는 곧 가난한 사람들을 교회에서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한국선교 초기 우매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이들과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던 선교사의 정신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종교가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인간의 모든 삶을 종속시켰던 중세 이전의 교회를 닮아가고 있다. 그 보다도 오늘 한국교회는 종교의 가치보다도, 경제의 가치에 무게를 더 두고 있다고 해도,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모두가 물질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물질을 쌓아두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물질의 썩은 냄새가 곳곳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생명의 양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회가 보이지를 않는다.

그렇다보니 무게의 중심을 잃어버린 교회가 서서히 침몰하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자본주의 신자유주의경제체제에 빠져 생명의 양식의 중요성을 잃어버렸다. 더 이상 한국교회는 가나한 사람들의 교회가 아니다. 모두가 가난한 사람들에 의해 교회가 성장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향해 교회가 하나님나라운동, 아니 성서에서 이탈해 타락해 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죽은자의 교회, 죽은자의 땅이 됐다.

종교개혁자 허버트는 종교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타락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모든 것들의 사이에서 혼란의 원인이 되는데, 그것은 사제들과 그들의 제의 때문이다. 계시종교는 거의 예외 없이 시간이 지나면 제도화되고, 그 과정에서 사제들 간에 권력투쟁이 일어나며, 사회적 갈등, 종교적 갈등이 일어난다고 한 말은 이웃 교회, 이웃 교단를 인정하지 않는 오늘 한국교회를 향한 지적임에 틀림없다.

분열과 갈등을 거듭한 한국보수교단의 연합체는 3개로 나누어져 있다. 지난 1년 동안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젊은 총회장의 희생과 공로로 인해 하나의 보수연합기관의 통합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됐다. 하지만 기득권을 내려놓지 못하는 일부 연합기관의 실무자와, 예수님을 교리로 만들어 그 뒤에 숨어버린 바리새적 목회자들에 의해 하나의 보수연합기관의 기대가 물거품이 됐다. 하나의 보수연합기관 통합은 금년 내로 이루어지기 힘든 상황이 됐다.

기독교대한감리회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을 정리해야만 통합 할 수 있다는 주장, “손해보면서 통합할 수 없다는 주장, “임시대표회장과 통합의 테이블에 앉을 수 없다는 주장 등은 3개 보수연합기관을 통합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나의 보수연합기관은 모두가 기득권을 내려놓고, 손해를 보지 않고서는 실현될 수 없다는 지적의 목소리를 겸허하게 받아드려야 한다.

일부 목회자들은 근본주의 신학에 갇혀 이웃교단의 신앙과 신학사상을 인정하지 않는 보수연합단체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절대로 통합이 안 된다고 조크한다. 한국교회총연합은 한기총과 한교연이 내세운 통합측과 감리교를 버리고 통합에 응 할 수 없다. 한교총의 입장에서 보면, “손해 보는 보수연합기관의 통합에 참여 할 수도 없고, 참여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이다. 이같은 각각의 주장은 보수연합기관의 통합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받아드려지고, 분열이 고착화 된 한국교회를 본다.

사회적 혼란 교리 뒤에 숨은 목회자가 주도

그렇다 이웃교단을 인정하지 않는 한, 하나의 보수연합기관의 통합은 없다. 이렇듯 종교, 특히 기독교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진리를 거역하며, 교파 간에 갈등을 일으켜 왔고, 일으키고 있다. 예수님을 교리화, 제도화 시켜, 사회적 종교적 갈등을 유발하는 과정은 한마디로 기독교의 타락 원리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의 타락은 종교개혁 이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다. 특히 국가종교를 표방한 나라들은 예외 없이 교리와 제도에서 이탈한 교파들을 핍박 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묘책이 바로 홉즈의 국가종교와 로크의 정교분리이다. 홉즈는 자신의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종교 간의 평화는 자연적, 이성적 원종교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국가종교로 발전시킴으로써 가능하다고 했다. 한마디로 국가권력이 종교권력을 장악해야만 다양한 방향을 가진 교파들 사이의 분열과 다툼을 통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항상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상태에 있다. 이를 통제 할 수 있는 수단은 국가권력 뿐이라는 것이 홉즈의 주장이다. 홉즈는 종교의 갈등을 인간의 본성으로 파악했다. 대립하고 투쟁하는 성직자들은 국가기관의 통제 하에 두어야만, 종교를 통제하고, 종교 간의 갈등을 봉합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 간의 평화를 유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홉즈는 종교를 영적사고이고, 정치인 것에서 최상의 것을 찾으려고 했다. 이신론자인 종교의 자연적 기원들에서 완전한 것을 찾으려고 했던 것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었다.

계시종교도 예수님을 교리로 만들어 사회적 혼란 야기

홉즈, 국가종교·로크, 정교분리 모두 교회보호 위한 법

존 로크의 정교분리 개신교 헌법의 기초

존 로크 역시 홉즈와는 정반대로 생각했다. 존 로크는 교파들 사이의 갈등을 극복하고 종교 간의 싸움을 막기 위해서는 국가와 교회가 완전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정교분리의 입장을 제시했다. 오늘 한국교회가 로크의 정교분리의 입장을 내세워 교회가 정치에 간여해서는 안 되고, 국가가 교회의 신앙생활에 간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오늘날 신종바이러스 감염증 상황에서, 이를 둘러싸고 교회와 국가 간에 대립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홉즈의 국가종교나, 존 로크의 정교분리 모두 종교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다. 존 로크의 정교분리의 원칙1669년에 발효된 미국 캐롤라이나주 헌법제정에 직접 간여했다. 이 헌법에 따르면, 모든 주민은 교파들 가운데 하나의 구원이 되어야 하고, 7-8명이 모이면 종교는 교회로서 인정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도 이 헌법의 영향을 받아 교회의 구성요건을 정하고 있다.

존 로크는 이 헌법에서 교회의 구성요건도 제시했다. 한 분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은 공적으로 예배하며 정부가 요구 할 때 주민은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도 종교적 집회를 방해 받거나 종교적 견해나 예배방식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한마디로 국가는 종교 활동에 일체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국가가 종교에 대해 관용하지 않으면, 사회적 갈등을 일으키고, 전쟁이 일어난다고 존 로크는 그의 편지 <관용에 관한 편지>에서 밝혔다.

존 로크의 <관용에 관한 편지>와 정교분리원칙은 개신교회의 헌법을 제정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한국교회 역시 <관용에 관한 편지>와 정교분리원칙을 기초로 교회법을 제정했다. 이 편지는 교회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자기 방식으로 예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단체이다고 교회를 정의하고 있다. 모든 교회법은 이것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존 로크는 국가는 종교적 활동에 대하여 관용의 자세를 가져야 하며, 시민적 법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에 대해서만 최소한으로 관여해야 한다고 국가종교를 거부했다. 한마디로 국가는 시민들의 일반적 관심을 보살피며, 특히 국민들의 물질적 행복을 위해서만 노력하고, 종교에 관련,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오늘 코로나19 정국서 교회가 신앙과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를 내세워, 국가권력과 맞서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존 로크는 정교분리 사상의 원조이며, 모든 국가가 법을 제정하는데 큰 영향을 준 관용법 사상에 따라 헌법에 신앙과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를 명시했다. 이것은 공산국가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로크는 성서에 나타난 기독교의 합리성에서, 홉즈의 예수는 메시야 이다는 항목을 그대로 받아드리고 있다. 그렇다 홉즈와 로크의 주장대로 그리스도인은 살아계신 한분의 신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성자로 고백한다.

여기에서 이탈하면 모두가 이단이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교리와 제도로 이단을 규정하는 것은 사회와 교회의 혼란과 혼동을 가중시킨다. 헌데 보수적인 오늘 한국교회, 근본주의 신학에 갇힌 한국교회, 강대국을 섬기는 한국교회를 보면, 모두가 성서의 진리에서 이탈했다. 그렇다 보니 인간사회는 종교에 의해 혼란과 고통으로 신음 할 수밖에 없고, 신음하고 있다. 인간사회는 신의 의해서 만들어졌고, 신이 의도한 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학이 발전하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신의 지혜를 인간의 지혜로 착각하고 있다. 인간의 이러한 범죄는 인간 사회를 혼란과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신의 질서가 깨지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인간의 도전으로 인해 신음하고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가 단절돼, 내가 너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균열이 생기면서, 기후변화로 인해 인간 모두가 스스로 죽음으로 내 몰리고 있다. 한마디로 생태계의 위기는 생명의 위기이며, 인간의 위기이다. 인간의 삶 전체의 생태계가 무너지고 있다.

애덤 스미스는 인간 사회의 혼란과 고통은 신이 원하는 질서를 파괴한데서 온다고 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는 인간의 죄로 인해 무질서에 빠지고 있다. 생태계가 교란되고 있다. 오늘 한국사회 안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동성애를 비롯한 기후변화 등은 신이 원하는 질서를 파괴한데서 왔다고 해야 옳다. 이를 둘러싸고 교회와 국가, 정치권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신의 질서를 회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어쩌면 회복 불능상태에 이르렀는지 모른다.

교회를 지배하는 번영신학을 버려라

모두가 이성을 잃어버렸다. 신의 질서는 자연의 흐름에 맡겨두면, 신의 지혜에 의해서 작동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 중세 종교개혁 이후 유럽의 평신도 신학자들의 주장이었다. 한마디로 보이지 않는 손, 신의 손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에 대한 위대함을 느끼고, 신의 질서에 순응하며, 나와 너, 그리고 그의 행복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전통, 개혁교의 전통에 따르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다. 따라서 스스로 자신을 구원 할 수 없다. 인간의 행동은 불가피하게 죄의 결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 인간은 이기적인 행동으로 인해 타인에게 이타적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인간은 나와 타인을 위해서 행동해야 한다. 인간은 결단에 따라 선을 행 할 수도 있고, 악을 행 할 수도 있다.

인간은 자신의 생존 보전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확고하게 지키기 위해서 타인의 생명을 해치기도 하고, 타인의 재산을 빼앗기도 한다. 홉즈의 말대로 인간은 인간에 대하여 늑대이다. 인간의 이러한 사악성을 순화하기 위해서 종교가 존재한다. 그러나 종교가 역기능을 했을 때, 국가가 종교에 간섭하는 일이 발생한다. 한마디로 종교가 해야 할 일을 저버리면, 국가가 나서서 종교가 해야 할 일을 한다. 특히 나눔과 섬김의 사랑의 실천에 교회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국가가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신자유주의경제체제에서 종교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경제에 종속돼, 종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종교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한국교회는 인간의 삶과 관련된 도덕성을 완성시키는 종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한국교회를 향해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길, 성서로 돌아가라고 충고한다.

예수님은 바벨과 맘몬을 거부하셨다. 돌로 만든 떡을 거부하셨다. 생명의 양식을 통한 풍성한 인류사회를 약속하셨다. 물질은 쌓아 둘 수 있지만, 생명의 양식은 쌓아 둘 수 없다. 인간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생명의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이며, 예수님의 길이다. 또한 십자가의 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 개혁교회 전통으로 돌아가자

성직자와 바리새적인 기득권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회와 종교계의 혼란과 고통 속에서 벗어나 하나님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기 위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극명하다. 한국교회 건강연구원(원장=이효상 목사)은 종교개혁 504주년 포럼서, 종교개혁은 자신의 개혁이며, 내려놓음이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회복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개혁의 불꽃임을 분명히 했다.

이 자리에서 손봉호 교수(서울대 명예교수)개혁교회는 말씀에 따라 항상 개혁되고 있다, “한국교회도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하며, 종교개혁 504주년을 맞이해 한국교회가 종교개혁의 정신에 얼마나 충실한가를 반성함으로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할 것이다고 조언했다. 특히 성경의 기복적인 가르침을 확대해석해서 번영신학을 한국교회의 지배적인 신학으로 만든 것은 종교개혁정신과 성경관에 크게 어긋나고 한국교회의 타락의 뿌리가 됐다고 지적했다.

손 교수는 또 유럽의 큰 교회당들이 텅텅 비고 허물어져서 그 자리에 상가 건물, 술집 등이 들어서는 슬픈 현상이 한국에 재현되지 않게 하려면, 성경과 종교개혁의 정신에 따라 구제와 선교에 헌금을 투입해야 할 것이다고 한국교회가 나갈 방향을 제시했다. 신종바이러스감염증 상황과 관련해서도, 손 교수는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가 보인 최대의 관심사는 시민들의 건강과 생명 살리기가 아니라 대면예배였다고 비판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희생과 봉사의 십자가 정신이 아니라, 자체 보존과 권리행사에만 관심을 집중시킨 것이다고 쓴소리를 쏟아 냈다.

최식 목사(다산중앙교회)도 인간의 권위, 교회구조의 계급화, 종교적 권위주의를 한국교회의 커다란 문제로 인식하고, 교회의 부패와 타락 혹은 세속화를 가져온 근본적 원인으로 교회와 교회지도자들의 권력과의 야합 곧 자리에 대한 지나친 야망, 물질에 대한 지나친 탐욕 두 가지를 들었다. 그러면서 대교회가 노회나 총회에서 영향력이 높아지는 현실 속에서 대교회 목회자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영향력이 확대되자 점차 교권화가 됐다고 지적했다.

생명의 양식을 이웃과 함께 나누자

이사장 정성진 목사는 코로나 팬데믹 시대 한국교회에 대해 따끔한 충고를 했다. 정 목사는 코로나 시대 대면예배를 강행하려는 데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무례함으로 비춰졌다. 신천지, 세계로교회, 안디옥교회, 영생교, 인터콥 등이 뉴스에 연일 보도되면서 한국교회 이미지가 크게 손상됐다면서,“몇몇 교회 목사의 이미지가 세상에 투시되어 안타깝다. 하지만 목사는 어떤 경우에도 목사다워야 한다. 한국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은 신앙적인 주체의식을 가지고 두 눈을 부릅뜨고 영적 판단력과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날마다 개혁신앙을 가지고 자신을 개혁해 나감으로 영적 지도력, 즉 영적 권위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한국교회는, 분열과 갈등이 만연된 상태로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 할 수 없다.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도 감당 할 수 없다. 모든 교단과 단체는 기득권을 내려놓고,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평화적인 민족통일과 남북한 민족의 화해를 위해서 봉사 할 수 있다. 교회가 분열된 상태로는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화해를 위해서 말 할 수 없다.

또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균열이 새기면서, 인간사회에 몰고 온 환경의 위기, 인간의 위기에 대해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그리고 무너진 하나님의 창조질서 회복해, 모든 피조물이 새롭게 창조되는 기쁨을 맛보아야 한다. 물질은 쌓아둘 수 있지만 생명의 양식은 쌓아 둘 수 없다는 성서의 진리를 깨닫고, 너와 나, 그리고 그가 함께 상생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특히 자본주의 신자유주의경제체제에서 신음하는 배성과 세계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하늘은 혼자 가질 수 없다. 생명의 양식도 혼자 가질 수 없다. 생명의 양식을 축적하는 순간 부패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나라도 혼자 갈 수 없다.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을 대한민국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면, 하나님은 남한민족의 하나님이며, 북한민족과 세계민족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자.

또한 세계복음화의 꿈은 본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복음 2819-20)고 한 기독교의 선교명령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만큼, 한국교회는 이제라도 쌓아 놓은 물질을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예수님의 삶의 현장서, 바리새적인 기득권자들에 의해 신음하는 이웃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이들과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는 일에 사용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 제504주년에 한국교회와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교훈이며,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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