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재 성 교수
김 재 성 교수

모펫 선교사는 남가주 몬로비아 시의 한 주택 차고에서 75세로 소천했다. 그가 일제의 간악한 수탈과 신사참배에 타협하지 않고 완강하게 거부하자, 할 수 없이 평양신학교의 문을 닫아야만 했고 한국에서 강제로 떠나야만 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받은 충격과 압박감은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아직도 한국에서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일본의 압제 속에서 살아가던 한국인들을 위해서 밤낮으로 기도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다시 한국 땅으로 돌아가서 그 땅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있었다. 

1864년 1월 25일 미국 인디애나 주 메디슨에서 태어나, 1884년 하노버 대학(Hanover College)을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시카고 맥코믹 신학교에 입학하여 1888년에 졸업하였다. 신학교 시절에 무디 선생을 만나서 함께 YMCA 기도모임에 참가하여 열정적으로 소명을 다짐하였고, “대학생 자원봉사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S.V.M.)에서 선교사의 소명을 불태웠다. 무디 선생은 신학교 수업을 체계적으로 받은 적이 없어서 선교사로 나가지는 않았지만, 미국과 영국 곳곳을 찾아다니면서 전도와 선교의 열정을 불어넣어주었다. 그가 주도한 “대학생 자원봉사운동”을 통해서 수없이 많은 젊은이들이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북장로회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어서 1890년 1월 25일, 만 26세 생일날에 입국했다. 한국말을 열심히 배우면서 전도 방법을 연구하였다. 

1891년 모펫은 게일과 함께 북부 지방 순회 전도 여행을 떠났다. 서상륜의 안내를 받아서 평양과 의주를 방문했다. 마침 의주 지방의 벌판은 황금물결을 이루어 추수를 기다리고 있는 벼가 널려 있어서, 낯선 전도자의 마음을 유쾌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는 선교사가 상주하면서 자신들을 인도해 주기를 소망하던 십 여명의 세례받은 성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압록강을 건너 만주와 북간도, 그리고 회령, 함흥, 원산을 거쳐서 답사여행을 마무리했다. 모펫은 평양으로 가서 개척 전도할 결심을 하고 한국에 온 지 3년 만에 이사를 마쳤다.

그가 평양에서 노방 전도를 하면서 뜻하지 않은 봉변을 여러 차례 당했다. 오랜 유교의 전통에 젖어 사신과 미신을 섬기며 살던 사람들은 낯선 외국인의 전도를 받아주지 않았다. 도리어 주먹으로 치고 조롱하는 무리들이 많았다. 

평양에는 이미 북간도에 가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들어온 성도들이 있었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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