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재 성 교수
김 재 성 교수

평양에는 이미 북간도에 가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들어온 성도들이 있었다. 모펫이 이미 하나님을 받아들인 백홍준을 만나게 되면서 평양에서 교회설립이 급진전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참으로 놀라운 만남이 연속되었는데, 백홍준은 평양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젊은이들을 차례로 모펫에게 소개하였다. 그들은 바로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평양에 들어와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의 사건들과 연관이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서경조, 김성집, 최치량 등이 십대 소년들이었을 때에,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장면을 목격하였던 것이다. 이미 27년 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이들은 토마스 선교사가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면서 전해준 성경을 간직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당시에 토마스 목사를 살해하던 조선 관군 박춘권의 가정에서도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나왔다는 사실이다.

 “평양신학교”는 한국교회의 요람이요, 산실이다. 그곳에서 초창기부터 형성되어서 내려온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사상은 철저한 말씀중심의 개혁주의 신학이다. 이것은 평양신학교 설립자 새뮤얼 모펫의 영향력으로 형성된 것이고, 정통 칼빈주의 신학사상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따라서 일부 카나다 선교사들과 소수 선교사들, 그리고 일제치하에서 적극적으로 활약하게 되는 일본유학파들의 자유주의 신학, 진보주의 사상에 기울어진 일부 신학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등장하게 되면서 순교의 의미와 저항 신앙의 계승에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한국교회 초기 순교자들의 희생과 헌신이 존귀히 여김을 받았고 ‘출옥성도’들마저도 추앙을 받았지만, 박해의 시대가 지나가고 난 후에 교회지도자들의 행동과 결정들은 혼란과 대립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한국교회가 신사참배에 대해서 회개운동을 전개하면서 분열되어진 역사를 살펴봄에 있어서 정말로 객관적으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길이란 전혀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1907년에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 일곱 명이 목사 안수를 받았다. 서경조, 이기풍, 길선주, 한석진, 송인서, 방기창, 양전백는 가히 민족의 지도자들이었다. 김익두 목사의 기적과 같은 목회사역들과 신사참배를 거부한 주기철 목사의 순교와 손양원 목사의 거룩한 희생, 해방 이후 남한에 세워진 교회들을 위해서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로 이어진 초기 신학자들의 제자양성과 신학의 정립으로 오늘의 모든 성도들이 가르침을 받게 되었고, 넘치는 은혜를 체험하게 되어졌다.  

필자를 포함하여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벌써 5대 혹은 6대를 내려오는 신앙을 물려받은 세대들이다. 그래서 초기 한국교회의 고난과 역사,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가장 잔혹했던 1940년대의 혹독한 핍박, 선교사들의 추방 등에 대해서 피부로 느끼지를 못했다. 더구나 해방 직후에 펼쳐진 혼란과 분열들, 한국전쟁을 전후로 했던 처참한 사건들에 대해서 직접 체험한 세대가 아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 생존하였던 분들의 기록을 더듬어서 판단해 볼 수 있는데, 김양선 교수가 쓴 「해방 후 한국교회 10년사」를 매우 중요한 객관적 사료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한국교회가 일제 36년의 강점기에 치러야 했던 신사참배에 관련된 해석들과 해방 후에 분열하는 과정에 대해서도 비교적 중립적인 관점에서 상세히 기록으로 남겼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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