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명 환 목사
김 명 환 목사

모든 죄악의 근원은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온다. 성서에서 욕망은 우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욕망에 이끌리는 마음을 가지고 산다. 인간에게 욕망이 없으면, 삶의 의미, 살아가야 할 의미가 없다. 이것은 생물학적인 본능이다. 인간은 환경에서 무엇인가의 욕망을 습득한다. 그러나 욕망의 농도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특히 자본주의에서 인간의 욕망과 사회주의에서 인간의 욕망에 대한 농도는 다르다. 

한국사람의 욕망과 탐욕은 그 어느 나라의 사람보다도 농도가 짙다.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이름까지도 바꾼다. 이름이 나빠 성공의 길이 막혔다며, 이름을 바꾼다. 목회자들 중 일부는 목회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과거를 감추기 위해 성서의 이름으로 바꾸는 이들이 적지 않다. 자신의 길흉화복이 이름 때문이라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름을 바꿔도 마음에 내제된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 

야곱이 새사람으로 거듭나겠다며, 이름을 바꿨다. 하지만 내제된 욕망은 버리지 못했다. 사랑이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에게 충성해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인가. 아니면 하나님에게 충성하기 위해서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구약성서 삼무엘하 23장 13-17절은 “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 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다윗이 그일라에서 피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말하매 사울이 가기를 그치니라/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다윗이 사울이 자기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 광야 수풀에 있었더니/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윗의 부하 3명은 목숨걸고 생명의 물을 떠 왔다. 하지만 다윗은 부하들이 생명을 걸고 길어온 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다윗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잘못도 인정했다. 다윗의 절제된 분별력과 절제는 통일왕국을 세우는데 원동력이 되었다. 오늘 대한민국은 토지를 둘러싼 논쟁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공기업이 주민들로부터 땅을 싸게사서 비싸게 팔아버리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우리는 산림청 직원들과 LH직원들의 비리를 본다. 산림청 직원들은 무성한 나무를 쳐내고, 거기에 비싼 나무를 심어 자신의 욕심을 채운다. LH직원과 국토부 직원들은 개발지역의 정보를 미리 빼내 주변의 토지를 매입해 엄청난 이득을 본다. 그리고 나무를 마구 쳐내고, 그곳에 태양광을 설치하면서 값싼 중국산 판넬로 탱양광 발전소를 설치한다. 값비싼 국산을 국가기관이 스스로 거부한다. 이들을 보면서 대한민국의 양심은 어디로 갔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욕망에 가득차 양심마저도 팔아먹는다. 그렇다보니 모두의 양심이 마비되었다, 욕망을 절제하고,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 많은 나라가 상식이 통하는 나라이다. 욕망을 절제하는 사람만이 상식이 통한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예수님의 말씀, 마태복음 10장 34-39절의 말씀은 많은 교훈을 준다. 이 말씀은 듣기 거북한 예수님의 교훈이다.

“<검을 주러 왔다(눅 12:51-53; 14:26-27)>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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