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성 길 목사
권 성 길 목사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은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으랴.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유안진 시인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일부의 글이다. ‘지란지교(芝蘭之交)’는 《명심보감》 ‘교우’ 편에 나오는 글로, 친구 사이의 맑고 높은 사귐을 이르는 사자성어이다. ‘지란지교’는 친구가 그리워지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글이기도 하다. 서로에게 이 글을 써서 선물하며 읽고 또 읽던 그런 시절이 우리에겐 있었다. 

성공을 이야기하면서 어떤 이들은 재산을 내세우고, 어떤 이들은 얼마나 높은 곳에 올랐는지 ‘지위’를 따지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가장 필요한 건 역시 친구이다. 세상이 다 나를 버려도 내 어깨를 굳게 안아줄 수 있는 친구, 내 편이 되어주는 친구, 함석헌 선생의 시구처럼 “위기의 순간에 구명대를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만한 친구가 이미 곁에 있다면 다른 이들의 성공이 뭐 그리 부러울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내 얘기보다 먼저 안부를 묻는다. “괜찮아?”
친구도 내게 물어온다, “다 괜찮아?”

쉼 없이 앞으로만 치닫던 걸음에 힘이 빠져 더 이상 한 발짝도 나지가 못할 듯싶을 때, 문득 돌아보면 오랜 친구의 쓸쓸한 눈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 얄팍한 위로의 말 대신 괜찮냐는 말로 모든 위로를 대신하며, 그는 슬쩍 웃어 보인다.

그 친구의 어깨가 아직도 굳건한지,
그 친구의 이상이 아직도 건재한지 살펴보는 건
친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이다.
나와 함께 평생을 갈 그 사람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할 수 있으니까.

나는 살아가면서 “괜찮냐”는 말로 위로하는 친구가 있다. 감사한 일이다. 너의 괜찮냐는 위로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맛을 느낀다. 그리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만든다. 그리고 내가 그를 통해 위로를 배우고, 그를 통해 하나님나라를 대망한다. 11월 감사의 계절 나를 위해주는 친구가 행복하다. 

새세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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