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헌 철 목사
서 헌 철 목사

정확한 통계를 산정할 수 없는 일이지만 떠도는 풍문에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리스도인들이 상당수가 아직도 점쟁이 집을 찾는가 하면 또한 하나님의 직통 계시를 받는다는 사람들에게 예언을 듣기 위하여 찾아다니는가 하면, 그러한 사람들을 미혹하여 자신의 권위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자들, 그러한 행위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받은 것 인양 포장하는 사람들 그러다 보니 점쟁이들에게 찾아다니면서도 기독교인이라 하는 사람들, 그들을 아무렇지 않다고 박수하는 기독교인 등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더욱이나 작금에 수능시험을 앞두고는 사찰이나 무당집 등을 찾는 이들이 있단다. 그런데 교회들도 이에 뒤질세라 경쟁적으로 수능시험을 위한 기도 집회 등을 갖기도 한다.

물론 기도는 아무리 강조하여도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왜 기도하고 있는가? 의문을 갖게 한다. 물론 자신을 지금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지속적으로 함께 하여 주시길 기도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아무 노력도 없는 데다가 내적 은혜도 없이 단순히 미신적 기도를 하는 것이라면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또한 이를 조장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외친다면 참으로 우려스럽지 않은가? 

특히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18:3-4)”는 말씀 등의 순수성을 왜곡하여 어린아이 같이 의지하며 기도하라? 이상하지 않은가? 참 신앙인 것같이 인용되는 말씀으로 보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는 우려가 있지 않을까?

한 예를 들어보자.
만돌 이의 아빠는 요즘 애들이 너무 응석받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만돌 이가 눈이 조금 온다고 300미터도 안 되는 학교까지 차를 태워 달라고 졸라 대자 어이가 없었다. 
“학교까지 태워달라고?”
그는 소리쳤다.
“만돌 아,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발을 둘이나 주셨다고 생각하니?”
그러자 만돌 이는 대답했다.
“한 발은 브레이크를 밟고 다른 발은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라고요.”(고정식 지음 웃기는 철학)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이야기 같지만,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만돌’ 이와 같은 사고로 기도를 하는 것은 안을까? 그보다는 두 발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나요?’라는 등의 기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1:15)”는 말씀과 같이 우리 우리의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들의 응답이 이루어진다면 교회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성경에 이르기를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

한국장로교신학 연구원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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