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수 강 목사
오 수 강 목사

기독교 이천년이래 기독교가 사회에 냉대와 조소, 비아냥거림을 듣는 일은 코로나19 창궐 이후에 일어난 신풍속이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기독교회 건물과 높이 달린 십자가, 그리고 그곳을 출입하는 신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신선했었다. 그리고 주일이면 성경책을 손에 들고 교회로 향하는 기독교도들에게 본인들은 같은 종교가 아니거나 무종교라고 하더라도 기독교도들에게 존경을 보내는 것을 느낌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코로나19라는 천역으로 인해 신 불신 간에 넓은 간격이 생겼다. 물론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열심히 당국의 방역 계획에 순응해 힘을 다해 동참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의 눈은 기독교가 오히려 방역을 가로막는 담이 되고 당국에 비협조적인 면으로 보이게 한 것은 미숙한 대처가 만들어 낸 오해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튼 기독교가 원인을 제공한 일이므로 감당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 기독교 전체에 해가 되는 행동은 삼가도록 함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교회의 내부는 개혁을 외치고 새로움을 이야기 하나 늘 바뀌지 않는 틀 속에서 소리만 요란하다. 한국 기독교가 외형적으로는 선교 이백 주년이 되었다고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교파의 분열로 인해 하나가 되는 길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먼저 교단들의 연합체가 특정한 성격도 없이 이해관계 때문에 여럿으로 나뉘어 각자도생하고 있음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도토리 키재기 식으로 연합조직은 정치적인 이해타산으로 늘 하나 되려고 하는데 발목을 잡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문제는 조직을 장악한 수뇌부 지도자들의 탐욕이 통합을 부정하고 있다. 

기존의 체계가 해체되면 그동안 꾸려온 자파 조직 와해로 인해 자신들이 설 자리가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미련이 한국교회 연합조직을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를 좌절하게 만들지나 않았는지 우려다. 거기에다 보이지는 않지만 분리된 연합조직들의 정체성이 보수냐 진보냐 하는 정치적인 성격 차이가 신앙을 앞세운 기독교 지도자들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일제 강점기와 6,25 한국전쟁으로 인해 자라고 파생된 사상과 이념의 갈등의 골을 거의 1세기가 되어가는데도 메꾸지 못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의 차원은 세상의 어느 종교보다 고등종교로서의 위상이 있음에도 이를 믿고 먼저 실천해야 하는 지도자들의 갈등은 신앙을 무시한 인본주의적인 사고가 아닐까 하는 걱정이다. 먼저 기독교인의 탄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신앙고백과 세례(침례)를 통해 거듭난 자들의 모임이라는 사실이 퇴색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월이 지나다 보니 신앙이 바리새인과 같이 변질되지 않았는지도 반성해 보아야 할 일이다.

교회, 교단, 연합회에 산적한 수만 가지의 일이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시간은 현재를 역사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새해를 맞이하는 꼴을 보이지는 말아야 한다. 제대로 된 결자해지는 사라지고 각자의 고집과 아집만이 남아 예전 체제를 그대로 반복하면서 말로만 송구영신이라고 외치는 입술이 부끄럽지 않도록 해야 한다. 기독교도들의 교주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 당 시대에도 종교인들도 있었고, 대제사장, 제사장, 율법사, 서기관 지도자들도 분명 있었다. 또한 성경도 있었고, 찬란한 성전도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전에서 벌어진 매매행위 돈 바꾸는 행위를 뒤엎으시고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다고 심하게 노하시면서 개혁을 단행하셨다. 왜 그렇게 하셨느냐 하면 유대교로서는 메시야를 기다리기는 하지만 오신 메시야를 믿지 않은 결과가 바로 십자가 사건을 통해 치부를 가리려 하였기 때문이다. 

메시야를 죽여 없애 버림을 통해 기득권을 지키려는 유대교의 잔악은 살았으나 죽은 조직을 여실히 보여주는 결론만 남겨 주었다. 성경의 기록은 오늘 기독교도들에게 주는 메시지다. 그런데 오늘에도 이러한 성경의 기록이 분명하게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시 되고는 있지만, 지도자로 자처한 자들이 바리새인들과 같이 동일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죄인지도 모르는 것이 문제다. 특히 분파주의 지도자들이 문제며 이들의 각성이 요구되는 현실임을 자각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자신의 어깨에 드리워진 무거운 분파의 짐, 비 연합의 생각, 자파세력의 권력 장악 욕심, 기득권에 대한 탐심, 중대형 교회의 세력을 무기로 교단 및 연합회를 장악하려는 욕심은 곧 낡아 터질 가죽 부대가 아닌가? 여기에 새 술을 담을 수 없다. 헌 가죽 부대를 새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예수님이 기득권을 가지고 성전을 시장터로 만든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을 모두 쫓아내셨다. 아무나 성전 기구를 들고 다니지 못하도록 엄명하셨다. 한국교회에 2천번이 넘게 계시를 보여주셨음을 잊지 말자.  
 
필운그리스도의교회/ 본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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