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헌 철 목사.
서 헌 철 목사.

네델란드의 유명한 화가 ‘렘브란트’는 그의 만년에 있어서 행색이 너무도 초라하고 굶기를 밥 먹듯 하고 다녔다. 그것을 본 그의 제자가 하도 딱해서 돈을 주며, “선생님, 이 돈으로 의복이나 한 벌 해 입으시고 맛있는 음식이나 사 잡수시오”했다.
 
그 돈을 받은 ‘렘브란트’는 제자의 말대로 의복을 맞추거나 맛있는 음식을 사 먹는 대신, 머리에 떠오르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물감을 사 가지고 자기 아틀리에로 돌아왔다. 이 화가에게는 입고 먹는 것보다 물감이 필요했고, 물감을 손에 넣음으로써 그는 행복했던 것이다. 그는 거대한 재력으로 훌륭한 집을 짓는 것보다 더 숭고한 모양을 가진 그림을 캔버스 위에 물감으로 나타낼 수 있는 위대한 재산을 마음속에 지닌 행복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행복이란 그 생명과 같이 자신과 더불어 밀착한 것이라야 한다. 우리가 남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그의 육체 속에 행복의 샘을 가진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모래 위에 씨앗을 뿌리면 자라지 않듯,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으면 새버리듯, 자신의 육체 속에 행복을 받아들일 그릇이 없는 사람에게는 소용없는 일이다.[알랭 (출처 : 박규정 편, 명상으로의 여행 문조사 1990)]

  ‘코로나 19’ 등으로 여기저기서 가슴을 치는 굉음들이 들려온다. 물론 그 파열음들은 어김없이 돈 문제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생각이 인간을 지배하는 관계라 그런지 돈으로 인한 파열음이 들려오는 것이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다. 물론 소상공인, 프리랜서, 어렵게 살아가는 이 등은 더욱 힘든 나머지 고통을 말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면 안도는가? 그러나 그 고통의 소리가 사치스럽게 들리는 것일까? 절박한 사람들에게 시급한 것임에도 무엇이 그렇게 바뿌냐는 식으로 말하 여유를 보이는 이들은 누구일까? 아마도 그리도 절박함을 당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아닐까? 그러므로 ‘빌 게이츠’는 자신이 세계적 갑부로서의 명성이 더 떨어져야 한다고 말한 바는 시사하는 바가 크게 느껴진다.

 물론 가진 자와 어렵사리 살아가는 이들의 차이는 없을 수가 없으나 인간으로서의 다름을 말하며 행동해서는 않되지 않는가? 누구든지 그 존엄과 가치, 행복 추구권은 보장되는 ‘대한민국’이 아닌가? 그래서 생명의 가치관은 상실되어가고 오직 돈의 욕망 인한 굉음에서 그리스도인의 행복의 기준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를 다시 한번 숙고해 보자, 

  ‘자기에게 주어진 그 무엇을 통하여, 자기의 욕망만을 추구하는 것 등에서 행복을 찾고자 한다면 그 행복은 항상 멀리 있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본분에 만족함을 누릴 때 그것이 곧 생명과 밀착된 그리스도인의 재산 곧 행복의 샘을 가진 사람이다’라는 등을 말 하면서도 우리는 어김없이 유혹으로 다가오는 사탄에게 밀착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파열음들이 들려오는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필자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새해를 맞이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기도를 하면서 다시 한번 다짐해본다. ‘하나님의 말씀에 종속된 은혜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생명의 역동성을 누리자’하고, 우리의 신앙도 ‘렘브란트’의 화가 정신, 정체성, 열정 등을 뛰어넘는 2022년이 되기를 바라면서 ~!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

한국장로교신학 연구원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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