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창 주 목사.
김 창 주 목사.

야곱은 그의 이름에 ‘속이다’라는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가는 곳마다 분란을 일으킨다. 야곱의 속임수는 성서의 독자들에게 정평이 났지만 그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아버지 라반을 속이는 것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야곱은 마침내 밧단아람의 객지생활을 정리하고 베델로 돌아가겠다고 결정한다. 야곱의 결심에 불을 지핀 것은 처남들의 험담 때문이었다. 그들이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그로 인해 재물을 모았다’며 수군거리는 대화를 엿들은 것이다. 야곱은 지체 없이 두 아내를 설득하여 떠날 채비를 한다.

이 과정에 라헬은 아버지 집안의 수호신이랄 수 있는 드라빔(םיפרת)을 훔친다. 구약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우상(םליל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퍼셀(לספ)은 본래 금은 등의 광물을 녹여 부어 만든 형상(출 20:4; 레 26:1; 사 44:9)을, 마체바(הבצמ)는 유적지의 기념물이나 조형물(레 26:1; 사 19:19)을, 아세라(הרשׁא)는 목재로 깎아 만든 신상(왕상 14:23; 왕하 17:10; 사 27:9)을, 그리고 마스키트(תיכשׂמ)는 돌에 새긴 그림이나 조각한 석상(레 26:1; 민 33:52; 겔 8:12)을 각각 가리킨다. 드라빔은 집안의 사당에 모신 조각상 형태의 신주(神主)다. 

드라빔이 영어권에는 대부분 household gods, 또는 우상으로 번역되지만(삼상 19:13, 16) 한글로는 ‘드라빔’으로 음역되었다. 사사기를 중심으로 드라빔은 대부분 소리 나는 대로 적었다(삿 17:5; 18:14, 17, 18, 20; 호 3:4; 슥 10:2). 우림과 둠밈처럼(출 28:30) 사사기에서는 ‘에봇과 드라빔’이 함께 언급되어 하나님의 뜻을 묻는 상징으로 활용되었고 요시아 개혁 때는 청산 대상이었다(왕하 23:24). 라헬은 아버지 라반이 자리를 비우는 틈을 통해 드라빔을 훔쳐 일행과 함께 떠났다. 

삼일 후 라반은 야곱과 수호신이 없어진 것을 알고 길르앗까지 추격한다. 작별인사 없이 떠난 야곱을 탓하지만 내심 드라빔을 찾으려는 속셈이다. 누지문서에 의하면 드라빔은 재산의 권리와 가족 구성원을 입증하는 공인된 표식이다.<Plaut, 214> 그렇기에 야곱은 드라빔이 발견되는 사람은 죽을 것이라며 결기있게 말한다. 라헬은 낙타 안장 밑에 드라빔을 숨기고 생리 때문에 일어날 수 없다며 위기를 모면한다(35절). 이런 연유로 드라빔은 음란하고 불결한 물건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미갈은 다윗을 숨기려고 드라빔을 사용한다. 즉 그녀는 드라빔을 침대에 놓고 마치 다윗이 누워있는 것처럼 염소 털로 머리를 씌우고 덮었다(삼상 19:13). 

라헬의 드라빔 사건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난처하다. 큰 줄거리로 볼 때 라헬이 아버지 라반을 속인 것은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인 것과 맥을 같이 한다(창 27:12). 가문의 수호신을 부당한 방법으로 취득해도 효력은 여전하고 저주나 징벌이 뒤따르지 않았을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라헬이 드라빔을 소지함으로써 야곱은 더 이상 아버지의 종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게 된다. 라반은 드라빔을 자발적으로 양도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점을 간파한 라헬은 아버지 몰래 과감하게 드라빔을 자신의 수중에 넣었다.<Plaut, 214> 둘째 라반이 도주한 야곱에게 드라빔의 저주를 빌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Bereishis, 1348> 심리적인 측면에 기대는 해석이다. 아마도 라헬은 그 지역의 민간신앙과 전통을 모르는 남편 야곱이 눈치 채지 못하게 기민하게 움직였을 것이다. 세 번째는 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해석이다. 레위기에 의하면 생리하는 동안 여인은 부정한 상태가 되기 때문에(레 15:19-20) 라헬이 드라빔을 안장 아래 숨겼다면 우선 그녀가 부정한 것은 물론 나아가 라반이 섬기던 드라빔까지 부정하게 되어 결국에는 무능한 신으로 전락한다.<Sarna, 216> 

야곱의 결단을 계기로 라헬에게 모든 것이 명료해졌다. 이제 아버지와 작별해야 하듯 그가 섬기는 수호신 드라빔과 결별하고 야곱과 함께 그의 하나님을 따라야 한다. 따라서 일찍이 다말이 그랬듯 라헬 역시 과단성 있게 자신의 믿음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마침내 야곱과 라반은 그동안의 오해와 서운한 감정을 털고 미스바에서 계약을 맺는다.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49절). 라반의 자녀에 대한 축복이자 드라빔을 밀어낸 신앙고백이다. 

 한신대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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