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창 주 교수
김 창 주 교수

바벨탑 사건은 왜 세상의 언어가 각각 다른지 설명한다. 그 전에는 ‘언어’와 ‘말’이 하나여서 상호 알아듣고 의견을 한데로 모았다. 야웨는 사람들이 한 민족이며 동일한 언어를 쓰기 때문이라며 그들의 언어를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흩으신다. 자세히 보면 히브리어 사파(הפשׂ)와 드바림(םירבד)에서 전자만 혼잡하게 되었고 후자는 그대로이다. 더구나 뒤는 복수이고 앞은 단수다. 바벨탑 사건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본문에서 사파는 다섯 차례(1,6,72,9절), 드바림은 단 한 차례 나온다(1절). 그렇다면 사파는 무엇이며 드바림은 무엇인가? <개역>은 사파를 ‘구음’(口音)으로 옮겼다. 영어 language처럼 혀와 입술의 움직임과 들숨 날숨을 통해 나오는 소리다. 한편 드바림은 ‘말’의 복수(words)로서 그 의미를 강조한 표현이다.<Westermann, 543>

먼저 사파에 관해서 탈무드는 천지 창조 때 통용되던 최초의 언어였다고 소개한다.<Jerusalem Megillah 1.9> 창세기 10장에 의하면 노아의 아들들 셈, 함, 야벳의 후예는 70 종족으로 나뉘었으며 ‘언어’ 또한 각각 다양하게 분화되었다(창 10:5,20,31). 세 차례 언급된 ‘언어’는 11장과 달리 혀를 뜻하는 라숀(ןושׁל)이다. 사파와 드바림의 차이를 부각시키기 어려운 상황인데 또 유사한 낱말 라숀이 등장하니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어근을 따라가면 어느 정도 식별은 가능하다. 곧 라숀은 혀(tongue), 사파는 입술(lips), 그리고 드바림은 혀와 입술이라는 주요 음성 기관을 통한 체계화된 말(words)이다. 위의 세 어휘들은 언어의 발전을 단계적으로 보여준다. 예컨대 라숀은 혀를 굴리는 옹알이 같은 소리라면, 사파는 지역의 언어처럼 상당히 분화된 상태를 떠올리면 된다(삿 12:6). 어머니는 옹알이를 듣고도 어떤 상태인지 안다. 사투리에 귀가 종긋한다면 그 말에 친숙하거나 알아차린다는 뜻이다. 이렇듯 옹알이와 사투리가 소통되지만 가족과 한정된 지역에 갇힌다.

이점에서 세 번째 드바림 에하드는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라숀과 사파와 달리 드바림은 복수 형태인 데다가 꾸미는 형용사 또한 복수(םידחא)로 나온다. 성과 수의 일치라는 문법적 해명으로 넘어가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하나’(דחא)를 뜻하는 형용사의 복수형 ‘아하딤’이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문자적으로 ‘하나의 말들’로 풀어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다. 구약에서 ‘아하딤’은 4 차례 쓰였다(창 11:1; 27:44, 29:20; 단 11:20). 창세기 11장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차례는 시간에 관련된 숙어적 용법이다. 곧 에서의 화가 풀릴 때까지 ‘몇 날 동안’(야밈 아하딤), 야곱이 7년을 마치 ‘며칠 같이’(커야밈 아하딤), 압제자가 ‘며칠이 못되어’(버야밈 아하딤) 등에서 보듯 상당히 오랜 시간을 한순간처럼 느낀다는 뜻으로 쓰인 예다.  

‘드바림 아하딤’은 시간이 아니라 ‘다바르’의 복수라는 점이 해석의 관건이다. 일부에서 숫자 ‘하나’의 복수형(םידחא)을 ‘유사한 말’이나 어휘 또는 어족(語族)로 설명하기도 한다.<Plaut, 86> 아람어, 히브리어, 아랍어 등 아카드어에서 파생한 셈족 어군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바벨탑 이야기에서 ‘하나의 말들’은 한 분이신 야웨의 말씀을 뜻하는 동적 질적인 의미의 복수다. 창조의 역동적인 힘이며 그분의 ‘입에서 나온 모든 것’이다(신 8:3). ‘드바림 아하딤’이란 복수형으로 강조할 수밖에 없다. 바벨탑 사건에서 다바르를 그대로 두신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절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다바르는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원하신 말씀으로 특정 개인이나 시간에 얽매일 수 없다.<Bereshis, 334; 보만, 198>

인간의 욕망이 쌓은 바벨탑 사건 이후 사파, 곧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게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하나님과 교감할 수 있는 길은 여전히 있다. 야웨가 드바림 아하딤을 흩으시지 않은 이유다. 드바림은 라숀이나 사파와 달리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이 소통이 가능한 야웨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다양한 소리와 방식으로 대화하신다(시 19:2-4). 바벨탑 이야기는 언어의 발전과 함께 분산이 일어났다는 원인론적인 일화로 간주되어 왔다. 표면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더 큰 메시지는 세상의 언어가 각각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말씀’ 곧 드바림 아하딤을 통하여 언제든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다는 사실이다(행 2:4).

한신대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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