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보 연 교수
장 보 연 교수

한국교회 교인의 70%가 여성이다. 그럼에도 교회 안에서 여성들의 위치는 궂은일이나 하는 교인으로 인식되어 왔고, 인식되고 있다. 그럼에도 기독여성들은 나라와 민족에게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고난의 현장’. 고난당하는 한민족의 중심에 서 있었다. 고난의 현장에 있었던 기독여성, 민족의 어머니의 역사는 남성중심의 기독교선교와 봉건적인 이데올로기로 인해 저평가 되어 왔다. 

3.1만세운동만 보더라도 기층 민중이었던 기독여성, 민족의 어머니는 만세운동의 현장에서 흰 무명저고리 입에 물고, 검은 치마 휘날리며,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쳤지만, 이들의 만세운동은 저평가되었고, 대신 자칭 민족대표 33인만 보인다. 기독여성, 민족의 어머니는 ‘고난의 역사’ 한복판에서, 독립군에 참여하기 위해 고향과 가족을 떠나 아리랑고개를 힘겹게 넘는 남편과 아들, 일본군에 끌려가는 딸들의 무사귀환을 위해서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기도했다. 

이들이 바로 역사의 담지자인 이 땅의 어머니이며, 기독여성이다. 그러나 기독여성, 어머니들의 역사적 평가는 매우 인색했다. 그것은 서양기독교 선교의 문제가 19세기 조선민족의 존망의 위기에 관련해서만 취급해 왔기 때문이다. 신학과 역사자체에 문제가 있었다는 말이다. 민족의 위기는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의 시작과 진전에, 따라서 한국교회 역사에 신학이 결정적으로 관계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 할 수 없다. 

일본의 한국침략은 구미자본주의와 식민주의 세력과의 결탁해서 실현됐다. 1905년 7월 29일 미국 대통령 특사인 육군대장 태프트와 일본 수상 가쓰라의 밀약(가쓰라-테프트 밀약)은 이를 대변하고도 남는다. 한반도에서의 기독교 선교가 서양의 식민주의와 무관하다고 생각해 온 선교사들, 선교사가들, 한국 교회 사가들의 생각은 오늘 기독여성운동을 저평가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여기에는 한국 기독교선교와 교회의 역사가 남자들에 의해서 쓰여 졌다는 것이 간과됐다. 

그렇다보니 오늘날 신학교를 나서는 목사후보생, 목사들은 고난의 현장에 있었던 기독여성, 민족의 어머니들의 운동을 저평가 할 수밖에 없고, 교회 내에서 여성들의 위치를 찾아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여성들은 이름도, 빛도 없이 하나님나라운동의 전위대였고, 전위대이다. 기독여성들은 이런 가운데서도, 가슴 속에 작게나마 민족의식이 살아남아 3.1만세운동 등에 적극 가담했다. 

그리고 아리랑고개를 힘겹게 넘어가는 이 땅의 아버지와 아들, 딸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기독여성들의 역사관은 남성중심의 역사관과 함께 제시 될 수가 없었다는 사실. 따라서 오늘날 기독여성의 역사는 남성중심의 역사적 문헌을 선교와 교회문제를 고찰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또 기독여성의 역사관과 활동은 전반적으로 남성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비쳐지고 있다. 

그렇다보니 여성운동이라는 여성의 문제 제기는 남성들에 의해서 대변된 역사서술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한마디로 남성중심의 역사관에 포함된 일부분으로 취급되어 왔고, 취급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여성운동가들은 “남성들에 의해서 대변된 역사를 여성운동의 전망으로부터 재반성하고, 재규정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들의 주장대로 모든 역사는 여성운동의 전역사로 고찰되어야 한다. 

모든 역사적 문제는 여성운동의 성취에 의해서 해답되어야 한다. 여성운동은 피압박 한민족의 민족운동에 포함하기도 하고, 또 여기에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또 한국기독교 140년은 남성들에 의해서 대변된 140년사에 포함되기도 한다. 여성운동은 여성만을 위한 주제가 아니다. 남성에 의해 주도된 역사적 문제를 규명하고 극복하는 주제이다. 한국 기독여성 140년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 아리랑고개를 힘겹게 넘은 이 땅의 어머니, 기독여성들의 새로운 미래, 하나님나라를 여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굿-패밀리 대표•개신대 상담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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