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성 길 목사
권 성 길 목사

잘 돌아가던 컴퓨터용 프린터가 고장이 났다. 사용 설명서를 꺼내놓고 이게 잘못됐나, 저게 잘못됐나, 하나하나 점검했다. 결국 애프터서비스를 신청했다. 수리하는 사람이 와서 들여다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코드를 안 꽂으셨네요”

황당한 경우이다. 이런 일도 있나 싶다. 하지만 이토록 기가 막힌 일이 자주 일어나는 것이 우리들 삶의 시간이다. 사랑하는 시간이다. 오랫동안 사용하던 기계가 고장 났을 때처럼, 사랑하는 마음이 한번 뒤엉키면 좀처럼 원인을 찾기가 힘들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이 매듭 저 매듭에 손을 대보지만, 꼬일 대로 꼬여버린 실타래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더 이상 어쩌지 못하는 순간이다. 게다가 사람 마음은 사용 설명서도 없다. 성분도 모르고 조절법도 난감하다. 깜깜한 미로에 갇혀 헤매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사랑이다. 언제부터 잘못됐을까? 어디가 문제였을까? 사랑은 문제의 시작조차 감추어버린다. 사랑에 빠지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자기감정에 취해서일 수도 있고, 그에게 집착해서일 수도 있고, 나에게 매몰돼서일 수도 있다. 부인할 수 없다. 사실 우리는 사랑을 하는 동안은 사랑을 돌아보지 않으니까.

사랑의 교과서로 칭송되는 알랭 드 보통의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도 우리들의 사랑과 다르지 않다. 파리에서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 안, 소설의 화자인 '나'는 그래픽 디자이너 클로이와 세상의 사람들 중에서 단둘이 만날 수 있는 확률, 그러니까 5840.82분의 1의 확률로 옆 좌석에 앉게 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희박한 확률로 만났다는 '낭만적 운명론'에 빠져 사랑을 시작한다. 그러나 때로는 진심으로, 때로는 거짓으로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다투고 미워하고 화해하고 오해하고 질투하고 원망하면서 두 사람은 사랑에 점점 지쳐간다. 그녀와 헤어진 후 '나'는 그녀의 흔적에 괴로워한다. '나'는 독백한다. 그렇게 그녀를 못 잊어 힘들어하지만, 시간은 어김없이 꾸역꾸역 흐르고, 영영 지워지지 않을 것처럼 선명했던 사랑의 기억도 서서히 흐릿해져 간다.

클로이와 함께했던 삶은 얼음 조각과 같아서 현재로 옮겨오는 동안 차차 녹아버렸다. 낙타는 시간을 따라 걸어가면서 짐이 점점 더 가벼워졌다. 계속 등에 실린 기억과 사진들을 흔들어 사막에 떨어뜨렸고, 바람이 그것들을 모래 속에 묻어버렸다. 낙타는 점점 더 가벼워져서 나중에는 그 독특한 모습으로 뛰기까지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마침내 현재라고 부르는 조그만 오이시스에서 이 지친 짐승은 나의 나머지를 따라잡게 되었다.

알랭 드 보통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나누고, 권태의 나날을 견디다 이별을 하고, 슬픔을 극복하고, 또 사랑에 빠지는, 사랑의 처음과 끝의 과정과 순환을 재치와 유머를 곁들여 치밀하게 그려나간다. 한번이라도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고 위로받을 만한 내용이다. 소설을 읽고 나면 누구나 내 사랑의 현재를 점검해보게 된다. 나는 그 과정의 어디쯤에 놓여 있는지를 말이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가끔씩 말에서 내려 자신이 달려온 길을 되돌아보았다고 한다. 말을 쉬게 하려는 것도, 자신이 쉬기 위함도 이니었다. 행여나 자신의 영혼이 뒤따라오지 못할까 봐 기다리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들의 사랑에도 인디언의 지혜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들의 사랑이 헝클어지지 않도록, 사용 설명서도 없는 우리들의 사랑이 고장 나지 않도록, 먼 훗날 손도 대지 못할 정도로 뒤엉킨다 해도, 어디에서부터 매듭을 풀어야 할지.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말이다. 
 
새세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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