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헌 철 목사
서 헌 철 목사

성경에는 아말렉과 전쟁한 사울 왕이 양과 소와 살진 것의 가장 좋은 것과 어린양과 모든 좋은 것을 노획물로 가져오며, 모든 백성은 진멸했으나 아각 왕을 산 채로 잡아온 사건이 있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일이 고대 로마에서도 있었다.

고대 로마인은 전쟁에서 잡은 적국의 왕후나 장군들을 매우 융숭하게 대접했다. 매일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향유로 몸을 닦아주고 비싼 옷을 입히며 더할 수 없이 극진하게 대접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좋아서 그랬던 것도, 예의를 지키기 위해 그랬던 것도 아니다. 다만 승리의 나팔을 불고 개선할 때 전리품인 그들을 이 거리, 저 거리로 끌고 다니며 그럴듯한 볼거리로 만들어 시민들에게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이복 여동생인 아르시노에(Arsinoe)를 포로로 잡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로마에 도착하는 날까지 그녀의 미모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목욕과 미용에 공을 들였다. 그러고는 개선하는 날 그녀에게 비싸고 화려한 옷을 입혀 길거리를 끌고 다녔다. 포로였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던 그녀는 시민들의 동정과 인기를 한 몸에 얻었다.(출처 : 사랑과 잔혹의 세계사. 2008. 바움)

물론 ‘아르시노에’가 시민들의 동정과 인기를 한 몸에 얻었고는 하나, 정복자는 그를 능욕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교만, 정욕에 의한 위선으로 정복자의 권력으로 불편 부당한 일을 자행하므로 사람을 고통의 늪으로 몰아넣으면서도, 평화를 위한다며 또 다른 전쟁을 계획한다면 그 진정성은 무엇에서 찾아야 할까?

전쟁은 물론 역시 승자만이 독식하는 대통령선거. 수많은 사람의 슬픔과 고통은 외면하고 승리만 하면 칭송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인정받는 현실이기에, 슬리를 위해서는 어떠한 짓을 해도 된다는 논리? 나는 옳은데 당신이 나쁘기 때문이라는 논리? 나는 엄청난 부정과 불의를 행하였어도 내가 이기었으니 내 뜻이 진리요 평화라면, 어느 한쪽에서는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소리 없이 헉헉대는 눈물은 누가 닦아 주어야만 한단 말인가? 그들의 소리에는 누가 귀를 기울여야 한단 말인가? 만에 하나라도 평화주의자, 인도주의자를 가장해 자기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통합을 말하며,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면 과연 그를 국민을 위하고 나라를 위한 지도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또한 그러한 승자에게 찬사를 보내는 이들은 누구일까? 

수많은 사람이 아픔과 고통을 주면서도, 나라의 안녕을 위해서는 불가분의 조치라고 권력을 사유화하는 이가 있다면 그러한 사람을 ‘전구환’에게 그리했던 것과 같이 ‘하나님(하늘)이 내린 지도자’라고 할 수 있을까? 과연 그들은 어느 나라, 어떤 국민을 위하는 것이란 말인가? 점쟁이, 우상숭배, 신천지, 통일교 등 사이비 이단자들과 함께 동승 해도 목적 달성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며 칭송한다면 그들이 과연 그리스도인, 성도일까?

불법 부당함 등을 행해서라도 목적만 이루면 그것이 선이요 진실이요 정의가 되는 것일까? 통합, 평화, 국민을 지키기 위해 전쟁도 불사하겠다며, 온갖 권력을 동원해 욕망을 채우는 등을 통치 기반으로 삼는다면 작금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며 내세운 논리와 무엇이 다를까? 예수님께서는 탐욕에 취해 선을 가장한 ‘가롯 유다’에게 ‘도적(盜賊)놈’이라고 하셨음에 혹시 우리도 그 대상은 아닌지? 겸허히 기도해보자!

(6)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 12:1-8)

한국장로교신학 연구원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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