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보 연 교수
장 보 연 교수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저 들꽃을 보라”고 했다. 성서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들꽃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인간은 “어찌하여 옷을 걱정하느냐”고 책망했다.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들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제자들을 향해 믿음이 약하다고 책망하셨다.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를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고 하셨다.

그렇다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믿음이 약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면서 살아간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는 “푸른 입사귀가 인간을 구원한다”고 노래했다. 이것은 동양의 인생관을 그대로 드러낸다. 한마디로 동양의 인생관은 자연과의 합일, 자연 속에서 자연과 어우러진 삶을 추구한다. 콘크리트 건물과 아스팔트에 둘러싸인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은 자연과 단절된 삶을 살고 있다.

흙을 밟지 못한 채, 자동차와 텔레비전, 컴퓨터와 함께 각박하게 살아가는 인간들은 “푸른 잎사귀가 인간을 살린다”는 말을 이해 할 수 없다. 자연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인간은 돌로 만든 떡을 먹고, 마음이 굳어져, 삶이 위축되고 비뚤어진다. 하나님의 창조세계, 자연을 떠난 인간의 삶은 삭막하다. 사막처럼 메마르고 난폭하다. 무한한 탐욕과 집착에 빠져 삶의 보람과 의미를 얻지 못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인간의 몸이 창조부터 자연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다. 인간은 흙에서 나오는 온갖 푸성귀와 곡식을 먹고 살아간다. 하나님은 흙과 햇빛과 물과 바람을 가지고 나뭇잎을 빚어냈다. 아름다운 꽃과 열매와 곡식을 만들어 낸다. 흙으로 빚어진 인간은 흙 속에서 생산된 먹거리를 먹으며, 자연 속에서 살게 창조됐다. 

이런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도전, 자연을 파괴하면서 창조질서를 교란시키고 있다. 푸른 잎은 탄소동화작용을 통해 산소를 만들어 낸다. 인간은 이 산소를 마시며 호흡한다. 분명한 것은 푸른 잎은 인간의 생명을 비롯해 생명계를 지탱해주는 기초이며, 양식이다. 모든 초식동물은 푸른 잎사귀를 먹고산다. 육식동물은 초식동물을 먹고 산다. 푸른 잎이 없으면 모든 생물은 생존 할 수 없다. 

생명의 먹거리를 생산하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인간의 탐욕 때문에 파괴되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동물이 죽으면, 그 시체를 풀잎의 양분으로 내어준다. 이렇게 모든 생물이 서로 얽혀 있다. 그리고 한데 어우러져 살아간다. 푸른 잎사귀는 모든 생명계를 지탱해 줄 뿐 아니라, 깨끗하고 영원한 것을 상징한다. 푸른빛은 자연세계의 바탕을 이루는 색이다. 푸른 풀잎이 산과 들판을 뒤덥고 있다. 거의 모든 나뭇잎은 푸른색을 띠고 있다. 

하늘도, 강물도, 바다도 푸른빛을 띠고 있다. 푸른 잎은 영원하다. 생명, 젊음, 순수, 진리, 신선, 께끗함, 청념을 상징한다. 부활의 계절, 생명의 계절 모두가 새로운 삶의 맛을 보아야 한다. 푸른빛은 타협을 모른다. 깨끗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생기와 희망을 준다. 푸른 잎은 인간을 구원한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자연과 어우러짐으로써 자유롭고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 

푸른 잎은 애욕에 물들지 않은 푸른 마음, 탐욕과 집착을 끊는 영원한 진리의 세계를 상징한다. 탐욕과 욕망이 가득한 세계, 불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저 들꽃을 보라”고 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보아야 한다. 들꽃은 아무런 욕망도 없다. 폭력을 행사하는 일도 없다. 거짓을 말하는 일도 없다. 끝없는 탐욕과 끝없는 폭력, 깊은 불신과 단절하라는 예수님의 말, “저 들꽃을 보라”는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자. 저 푸른 들꽃과 들판을 보기 위해서 맑은 눈을 가져야 한다. 
                   
굿-패밀리 대표•개신대 상담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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