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시작됐다

신종바이러스감염증이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전쟁으로 인해 인류의 삶이 매우 곤궁한 가운데 있다. 예수님의 평화(샬롬)와 하나님의 참사랑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는 시작됐다.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탐욕과 소유욕, 권력욕, 지배욕에 사로잡혀 있는 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는 열리지 않는다.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수 없다. 미래는 열리지 않는다.

이런 경고에도, 인간 모두는 자기 안에 갇혀 혼자만 살겠다고 아우성친다.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는 굶주린 자, 매일매일 양식을 걱정해야 하는 자, 소음과 유독성 화학물질로 인해 몸이 병들고 있는 자, 환경파괴로 아사직전에 있는 가난한 나라의 국민, 전쟁으로 인해 고난당하는 민족들을 돌 볼 때 시작된다. 그래야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에 참여할 수 있다.

인간은 혼자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이웃과 더불어 살도록 창조됐다. 신종바이러스감염증으로 수백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민간인들이 희생을 당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들이 누려야 할 참사랑과 평화가 위협받고 있다. 언론에 보도되는 사건들은 양심·윤리·인권·인격 같은 말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돈을 벌수만 있다면, 너를 죽인다. 쾌락을 누릴 수 있다면, 윤리 따위는 필요가 없다.

국민을 위해서 일하겠다고 나선 국회의원 등 정치인들은, 자신 한사람을 위해서 국민을 악용한다. 오락실 비용·라이트 유흥비용을 마련하려고 스스럼없이 강도가 되는 청소년들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돈 때문에 부모를 살해한다. 자기 안일과 쾌락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내가 편해지기 위해서 예사로이 사람을 죽이는 사회가 됐다.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음란한 세태가 됐다. 모두가 자기를 위해서 산다.

모두가 자기를 하나님으로 삼는다. 모두 자기 자신에 대한 우상숭배자가 되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떠나는 교인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이웃교회 교인을 빼앗는다. 갈수록 개신교의 교주는 늘어나고 있다. 모두 자신을 찬양하는 것에 고무되어 있다. 공룡교회는 이웃 작은 교회를 집어 삼킨다. 최근 1만교회가 문을 닫았다고 한다. 이런 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한사람의 웃음을 위해 1만명이 눈물과 피 그리고 땀을 흘려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한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많은 교회가 희생해야 하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이며, 사회이다.

인간 모두는 가던 길서 돌아서야 한다. 부활의 계절, 생명의 계절에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새로운 세상,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자.
인간 모두는 가던 길서 돌아서야 한다. 부활의 계절, 생명의 계절에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새로운 세상,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자.

십자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들만이 새로운 세상 연다
탐욕
·쾌락의 길에 들어선 인간, 가던 길서 돌아서라

생명을 잃어버린 인간, 미래 없다

사실 농촌교회의 희생 속에서 성장한 한국교회는 농촌교회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이런 상태로는 부활의 계절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에 참여 할 수 없다. 자기만을 생각하고, 남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은 지옥이 되어가고 있다. 이 세상에 죄 없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이 세대에 범죄에 대하여 나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추악한 범죄들은 이 세대를 지배하고 있는 구조악의 결과이다.

인간 모두가 지배욕과 소유욕, 쾌락으로 인해 카인이 되어 가고 있다. 오든 인류는 죄 아래 있다. 오늘날 저지르는 범죄는 우리 모두가 공범자이다. 인간 모두는 돈을 모으기 위해서, 좀 더 높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 쾌락을 누리기 위해서 정신이 나가 있다. 인간은 허망한 것 때문에 눈이 멀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이웃의 아우성 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되었다, 모두 허망한 꿈을 꾸고 있다. 인간에게서 양심, 윤리, 체면 따위를 찾아 볼 수 없다. 분별력도 잃어버렸다.

결국 인간들은 돌로 만든 떡을 먹고 마음이 굳어져 생명의 맛을 잃어버렸다. 생명의 맛을 잃어버린 인간은 미래를 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활의 계절, 생명의 계절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에 참여 할 수 없다. 이런 인간들은 하나님의 기쁨을 맛볼 수 없다. 평안도 맛 볼 수 없다. 사랑도 주고받을 수 없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에 대해서 모른다.

모두가 허황된 꿈에서, 아니 탐욕과 쾌락의 길에서 돌아서지 않고 있다. 자신을 방탕에 내맡겨 돌아서지 않고 있다. 회개 할 줄을 모른다. 가다가 돌아서는 자만이 미래를 볼 수 있다. 미래를 열 수 있다. 회개하는 자만이 새로운 세상, 새로운 나라, 하나님나라에 참여 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이들은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새인간, 생명의 맛을 모른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해서 생명의 역사를 시작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에베소서 417-19)

에베소서 419절의 말씀대로 이 시대는 모두가 분별력을 잃어버렸다. 판단력이 흐려져 옳고그름을 모른다. 가기 안에 갇혀 자기주장을 하기에 바쁘다. 자신을 신으로 만들어 버린다. 어디로 갈까 망설이며,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다. 더러운 일들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한마디로 예수 안에 있는 진리를 잃어버렸다. 우리는 예수 안에 있는 진리를 예수 안에서 배웠다. 그러나 모두가 에수 안의 진리를 망각하고, 내 멋대로 산다.

이제라도 우리는 낡은 인간성, 곧 정욕에 속아 썩어져가는 인간성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마음의 영이 새로워져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로운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영이 내안에 임하여, 나에게서 너와 그에게로 흘러 썩지 않는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옛 인간은 증오의 인간이었다면, 예수님은 사랑의 인간을 소유한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의 참사랑을 인간에게 행동으로 교육했다. 예수님은 사랑 받을 가치가 없는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죽임을 당하면서 사랑하셨다. 십자가는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한 고난의 상징이다. 십자가는 사랑의 표징이다. 이런 십자가를 금으로 만들어 목에 걸고 다는 인간들은 한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고난을 모르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잃어버린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삼으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무엇보다 사랑을 배웠다. 예수님은 사랑받을 가치조차 없는 인간들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셨다.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면서까지 사랑하셨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고 교육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욕하고 저주하는 자들을 용서하고 기도했다. 원수까지 사랑하셨다. 갈릴지브란은 자신의 저서 <인간의 아들 예수>에서, 예수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너를 사랑하지만, 나는 너를 위해 너를 사랑하다

그렇다 너를 위해 너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이 몸으로 실천하며, 교육한 사랑이다. 이 사랑만이 인간을 새롭게 할 수 있다. 이 사랑만이 인간 내면에 깊이 쌓인 증오를 몰아낼 수 있다. 나의 어설픈 사랑으로는 증오를 몰아낼 수 없다. 우리는 이 부활의 계절, 생명의 계절에 십자가의 사랑이 증오의 세력을 이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안에서 불붙었을 때, 증오의 힘은 극복되고, 너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다.

힘에 의한 평화 대신 샬롬을 외치자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샬롬)을 교육 받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메리카평화, 로마평화, 소비에트평화, 자이나평화를 찬양하며, 힘에 의한 민족통일을 노래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했을 때, 천국천사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고 찬양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태어 날 때부터 평화의 왕으로 태어났다. 헌데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평화를 말하지 않는다. 대신 힘에 의한 평화를 사랑하고 외친다.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다. 예수님은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그것도 나귀새끼를 타셨다. 나귀 새끼를 타고 절대로 전장에 나갈 수 없다. 예수님은 평화의 복음을 선포했다. 즉 예수님이 행동으로 보이시고, 가르치신 하나님의 참사랑과 평화는 복음이다. 헌데 세계는 너를 죽이기 위한 무기를 만드는데 천문학적인 달러를 쏱아 붙는다. 이런 사이 매년 수만 명이 영양실조나,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

강대국들은 무기를 팔아먹기 위해 전쟁을 부추긴다. 우리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똑똑히 묵도하고 있다. 가공 할 신무기가 개발되면서, 재래무기들은 어디엔가는 버려야 한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강대국들은 절대로 남북한민족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 남북한 민족은 우리민족의 문제, 한반도의 문제를 우리의 땅에서, 우리 스스로 결정해 본적이 없다. 모두 외세에 의해서 결정되었고, 경정되고 있다.

대한민국, 아니 한반도의 운명을 외세에 맡기는 꼴이 됐다. 우리는 이들 나라를 믿고 있을 수만 없다. 이들 나라는 한반도의 평화를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 분단된 상태로 있어야 이들 나라에 돈이 되고 이익이 된다는 것을 이들은 잘 안다. 이런 상태로 우리민족은 새로운 나라, 새로운 미래를 열어 갈 수 없다.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에 참여 할 수 없다. 이제라도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참사랑과 평화를 교육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삶의 현장, 역사의 현장에 들어가야 한다.

한민족의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분단의 현장에 교회를 세워야 한다. 이 곳이 바로 예수님의 삶의 현장이다. 이 곳에서 한국교회는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한민족의 화해를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에수님깨서 가르쳐 준 평화이며, 하나님의 참사랑이다. 민족을 배신하면서, 강대국에 붙어 수억 원을 챙기는 공직자, 아니 변호사는 되지 말아야 한다.

증오와 죽음의 길에서 돌아서자

예수님의 생애는 온전히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사셨다. 오늘날 인간은 자기만을 위한 존재였다. 남을 위한 존재가 아니었다. 우리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자기만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 너를 위해 사는 삶을 살 때 비로소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에 참여 할 수 있다. 그리고 옛사람의 모습을 벗어 던져버리고, 새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 내재된 탐욕과 정욕, 그리고 지배욕과 소유욕을 버릴 때 비로소 새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

예수님은 삶은 버림받은 자, 고난당하는 자들을 위한 삶이었다. 우리도 신종바이러스감염증으로 인해 곤궁한 삶을 살아가는 이웃, 전쟁의 참화 속에서 평화를 갈망하는 세계민족,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고통당하는 가난한 나라의 국민, 장애의 몸으로 생활이동권을 주장하는 장애우,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교회에서 밀려난 노숙자, 부모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겸손하고, 스스로 낮아 지셨다. 나라의 지도자가 가난한 삶을 살지 않고, 부자가 되겠다고 한다면, 그 나라는 주정부패가 만연하고, 국민들은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다. 고위공직자와 정치인들이 재산을 공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야당 대표가 자신의 정치력 확장을 위해서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을 괴롭힌다. 4·6호선은 자신의 선거구를 통과한다. 시민들이 짜증을 낸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전철을 이용하는 시민 누구도 짜증을 내지 않았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다. 이들은 나귀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환영한 예루살렘 시민들과 다르지 않다. 예루살렘 시민들은 죽음 앞에 있는 예수님을 비난하며, 배신했다. 그렇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지면서, 장애인들을 고쳐주신 예수님의 참사랑에서 이탈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심성을 간파한 사도 바울은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교인들에게 교육했다.

이것이 오늘 교회지도자들이 교인들에게 가르쳐야 할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문제는 이런 마음을 품고, 생활하는 그리스도인이 보이지 않는다는데 안타깝다. 예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교회도 잘 섬기지 않는다. 진정한 겸손은 자기 비움에서 온다. 그리스도인들은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고, 항상 기뻐하라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행동해야 한다.

불행이 닥쳤다고 절망에 빠지고, 행운이 닥쳤다고 오만해지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을 믿은 결과가 가져다가 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절망도, 오만도 없다. 기쁨과 평강이 넘친다. 원죄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을 믿는데서 온 것이다. 절망과 오만은 자신을 믿는데서 싹터 온다. 자신 밖의 실재를 믿을 때, 감사와 기쁨, 기도가 넘쳐난다. 헌데 모두가 자신을 믿는 교주가 된다. 교주로 만들어 버린다.

증오와 죽음에 이르는 길에서 돌아서자

부활의 계절, 생명의 계절,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시작됐다. 탐욕과 정욕에 길들여진 옛 인간성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새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야(회개) 한다. 허망한 욕심에서, 정욕에 눈이 어두워 쫓아가던 길에서 돌아서야 한다. 구조악 속에서 자기 안일에 빠져 사는 사람은 파멸에 빠지고 만다. 사회도, 정치도, 경제도, 파국에 이른다.

이제라도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계절, 생명의 계절에, 증오와 죽음에 이르는 길에서 돌아서자. 나 자신의 죄, 세대의 죄를 통회의 눈물로 회개하자. 피 묻은 손을 위해 기도해 준 목회자들은 통회의 기도와 함께 평화의 악수를 나누어야 한다. 굳게 닫았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자. 마음의 보좌는 나의 욕망과 탐욕이 아니다. 그 자리를 생명의 길을 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차지하게 하자.

이럴 때 우리는 새 인간성을 입게 된다.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에 참여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옛 인간성은 십자가에 못 박혔다. 썩어져가는 옛 인간성은 죽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새 인간성을 입었다. 혼자의 힘으로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수 없다. 늪에 빠진 사람은 혼자 나올 수 없다. 이렇듯 탐욕과 쾌락에 빠진 사람은 혼자 새 인간이 될 수 없다. 나의 절망과 오만은 낡은 인간인 나 자신의 그림자라는 것을 알자. 우리 모두 너를 통해 내가 구원받는다는 것을 깨닫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로 닫힌 우리의 마음에 머물지 않는다. 닫힌 마음으로는 너를 받아드릴 수 없다. 우리 모두 마음의 문을 열고, 전쟁과 전염병으로 고난당하는 이웃을 받아드리자. 편견과 욕심 때문에 멀었던 눈을 열어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을 보자. 아집과 무관심으로 막혔던 귀를 열어 살기 위해 노동현장에 나갔다가 주검으로 돌아오는 노동자와 생활이동권을 주장하며 매일 시위를 벌이는 장애우들의 아우성 소리를 듣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고난당하는 보잘 것 없는 사람 사이에 가로놓인 높은 담을 허물고 서로 화해의 악수를 하게 한다. 이 만남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새인간으로 태어난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계절, 부활의 계절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이며,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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