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헌 철 목사
서 헌 철 목사

해묵은 책들이 쌓여 있는 가운데 노랗게 변색 되어 있는 책(세계를 움직이는 100인”이란 1987년 1월호 신동아 별책부록)을 꺼내 보았다. 이 책은 과거의 인물들에게서 작금의 필자의 모습을 비쳐보게 하였다.

‘칼 발트(Karl Barth)’에서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 등 현대 신학자들은 “신학의 사명은 변하지 않는 복음이 각각 새로운 현실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흑인들이 노예 화 되어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몰트만’이 누구인가 ‘희망의 신학(Theology of Hope)’의 대부라 할 수 있지 않은가? 그가 추구했던 희망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던지게 한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교회는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을 넘어 혼잡으로 치닫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방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물론 순교적 봉사 신앙으로 몸부림치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제임스 콘(James H. Cone 1938~)’은 백인 신학자들이 ‘인종차별주의’와 ‘복음’이 날카롭게 대치된다는 점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백인들의 억압 아래 있는 흑인들에게 자유롭게 하는 복음의 힘을 적용시켜 주는 것이 절박한 요청이라고 하며 흑인 신학은 곧 혁명의 신학을 낳기까지의 과정이란 점을 주장했다.

매일 매일 백인들의 억압, 폭력, 거짓말 등으로부터 어떻게 힘없는 흑인들을 해방 시켜 주는가 하는 과제는 성경이 백색(백인의 사고와 이익)으로 도색 되어진 데서부터 ‘성경을 해방 시켜야 한다’는 데 있는 것이다. 백인주의 개인주의 자본주의 등에 의해서 독점되고 ‘도색 된 복음’이 그들의 지배 논리로 악용당하고 있는 사태로부터 복음 자체가 원래의 역할대로 ‘구원과 해방의 힘’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인이 주목했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을 당하였다. 과연 그는 누구의 뜻에 따라 누구를 위해 죽음의 길을 갔단 말인가? 그런데 그가 총탄에 쓰러지던 때, 그 몸서리쳐지는 인종차별 속에서 학위를 받고도 교단에 서지 못했던 ‘제임스 콘’은 ‘흑인해방신학자’란 평가를 받고 있었지만, ‘구스타프 구티에레즈’와 쌍벽을 이루었던 ‘환 루이 세군도(Jun L. Segundo. 예수회 신부)’는 ‘하비 콕스’, ‘칼 막스’, ‘막스 웨버’, ‘제임스 콘’, 등 네 사람을 비교한 후 해석학적으로 완결된 사상은 ‘콘’밖에 없다고 극구 칭송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현실주의 계보에 서 있는 ‘베넷’ 등 많은 백인 신학자들은 ‘콘‘의 신학을 비판하였고, 한국의 신학자들도 ’콘‘을 비판하는 흐름에 있었다. 그러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일(1960년 1월 21일)이 미국 연방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으며 ’오바마‘라는 흑인 대통령이 재선까지 이루어냈을 땐 분명 격세지감을 느끼기도 했었다. 그러나 한마디의 변명마저도 상실해 버린 듯한 백인 신학자들, 교인들의 분노, 증오, 멸시 등은 과연 사라졌었는가?

  대통령선거로 인한 것일까, 극명하게 분열을 보이는 한국기독교의 현실, 과연 우리의 모습은 어떠하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우상숭배 등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듯한 위험성 앞에 복음의 진실성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을까? 사순절 끝자락에서 코람 데오(coram Deo) 곧 “하나님 앞에서”를 외치고 있다면 우리의 모습 이대로 거울 앞에 서 보자.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한국장로교신학 연구원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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