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성 길 목사
권 성 길 목사

아담은 사랑을 위해 갈비뼈를 하나 상실(양도)했다. 야곱은 애인 라헬을 위해 14년을 노동했다(창 29:20), 룻은 남편 없는 시모를 위해 “내가 죽는 일 외에… 떠나가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소서.”라고 했다. 

삼손은 기생을 사랑하다가 머리카락이 잘렸다. 다윗은 사울 왕의 딸 미갈을 사랑함으로 원수 불레셋 남자의 양피(陽皮, Foreskins) 200개를 끊어 바쳤다(삼상 18장), 솔로몬은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고 했다. 

그런데 인간의 그 어떤 에로스의 사랑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사랑이 있다. 그것은 곧 아가페의 사랑이다. 아가페는 하나님의 참사랑이다. 사랑은 주고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면서, 사랑을 주고, 받도록 창조하셨다. 고아가 불쌍한 것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랑 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는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 백 마리 중 한 마리를 잃은 목자의 심정, 10개의 은돈 중 한 개를 잃고 온 집을 쓸며 찾고 있는 여심이 있다. 한 마리의 양은 아흔아홉마리의 양보다도 소중하다. 인간의 계산으로 상상 할 수 없는 아가페이다. 예수님은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가시밭길과 벼랑 끝을 헤메셨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으면, 어깨메고 돌아와 이웃을 초청하여 잔치를 연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아가페이다.  

가슴을 치며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하는 세리를 향하여 “의롭다”하신 주님, 십자가상에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강도를 불쌍히 여기신 구원선언은 너무도 고귀하다는 예수그리스도의 아가페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하겼다. 예수님은 아가페는 나를 열어 너를 받아드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아가페는 기쁜소식(복음)이다. 

세 번이나 주를 부인한 수제가 베드로를 세 번이나 다짐하면서 ‘사랑의 회복’을 요구하신 예수님은 구리철사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맨 것을 인자의 죽음을 묘사했다. 그러기에 사도 요한은 독생자 예수를 “주셨다”라고 했으니, 죄인의 손에, 빌라도의 손에, 가룟 유다의 손에, 그리고 우리의 손에 주셨다. 

못은 로마 병정이 박았어도 주신 이는 하나님이요, 언도는 빌라도가 내렸어도 사실상 예수님이 죽음을 자청하셨다(요한복음 19:11, 18:11, 37).

바울 사도는 사랑의 매력에 끌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끄도다) 하시는 도다.”(고린도후서 5:14)라고 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에베소서 3:18~19)라고 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8~39)고 그는 사랑의 개가를 불렀다. 

사랑은 봉사에 선행하며, 희생을 즐기고 주어야만 하고, 죽어야만 한다. 신·구약 성경은 사랑의 연쇄작용이고, 주인공은 예수님이며, 많은 배역들이 시대와 배경을 달리하고 배출되어 왔었다. 

그 큰 사랑은 사랑의 원천이신 예수님만 행할 수 있었고, 그 오묘한 사랑은 그를 신앙하는 신자만이 체득하리라. 진실로 사랑은 이론이 아니고 체험이며, 내 것이 아니고 ‘서로의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기에 …            

새세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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