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아침,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에 참여해야 한다. 생명의 계절에 세계는 전염병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잘못된 지도자들에 의해 평화가 깨지고 있다. 살기 위해 노동현장에 나간 노동자가 주검으로 돌아오는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는 시작됐다. 부활의 계절, 그리스도이 가야 할 길은 분명해진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도 이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이들과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그리스도인은 진실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사회적 약자를 섬겨야 한다. 진정한 겸손은 자기 비움에서 온다. 헌데 오늘날 자신을 비우겠다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과 함께 하겠다면서, 이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철저하게 챙긴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빌립보서 21-5절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교육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오늘을 살아가는 각 사람에게서 겸손함을 찾아 볼 수 없다. 야당의 대표는 사회적 약자를 괴롭히며, 자신의 정치적 영역을 넓혀간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아니다. 장애우들이 자신의 선거구 4·7호선 전철에서 시위를 한다고 짜증을 낸다. 분명한 것은 장애우들의 행동에 누구도 짜증을 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마음이다. 헌데 자신의 정치적 욕심을 위해 사회적 약자를 악용하는 것은 생명의 계절, 새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참사랑(복음)을 실현해야 할 교회는 사회적 약자들을 외면한다. 지도자를 잘못 만나 평화가 깨져 세계민족이 고통가운데 있는데도, 교회는 여전히 힘에 의한 평화를 외친다. 예수님의 평화, 샬롬의 목소리는 그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진정한 평화는 사회적 약자를 겸손하고, 온유함으로 보살펴 줄 때 찾아온다.

예수님은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면서, 하나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진리에 의한 통치를 실현했다. 예수님의 심성을 간파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5절에서 너희는 너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했다. 이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가르친다. 헌데 주님의 마음을 너의 마음에 품으라고 하는 자는 보이지 않는다. 예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교회도 잘 섬기지 않는다.

인간 모두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스스로 포기했다. 모두가 마음이 닫혀 있다. 나의 마음을 열어 너를 받아드리지 못한다. 너를 통해 내가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를 망각했다. 관계는 서로 자신을 열 때 성립된다. 서로 자신을 여는 행위는 사랑이다. 나를 너에게 내주는 행위이다. 이것은 나의 존재를 거는 용기이며, 모험이다. 나의 존재를 걸고 살 때만이 삶의 기쁨을 얻을 수 있다. 새 인간이 될 수 있다.

자기 안에 갇혀 사는 삶은 이웃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이웃의 아픔을 모르고, 혼자만 살겠다는 것이다. 모든 악의 근원은 하나님 중심의 삶에서 이탈하면서 발생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다. 자신들은 절제된 삶을 사는 경건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전혀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자리, 처형의 자리에서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박다니하고 부르짖으셨다. 이 절규는 역사와 사회를 지배하는 죽음의 세력에 대한 항거이며, 부르짖음이다. 이것은 죽음의 세력을 깨뜨리고 사랑과 생명을 주는 하나님을 향한 절규이며, 호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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