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야 할 사람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죄인

4월은 생명의 계절, 부활의 계절인 동시에 장애인의 달이다. 4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하늘을 향해 소리치는 장애인을 비롯한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아우성, ‘한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들과 함께 소리치자. 인간은 왜 죄인인가(?)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죄인이다. 오늘 우리사회는 사랑받고 보살핌을 받아야 할 장애인과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현대인 10명 중 6명이 장애를 갖고 있다는 통계가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혼자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다. 때문에 장애인들은 거리로 나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집단행동을 벌인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아우성친다. 그러나 이 아우성은 돌로 만든 떡을 먹고, 마음이 굳어져버린 인간, 장애인을 괴롭히는 정치인들에게는 꽹과리 소리로 들린다. 귀가 막혀 청아하고 맑은 소리, ‘한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얼마 전 야당 대표가 자신의 정치적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 장애인 생활 이동권에 대해 주장하며, 지하철에서 시위를 벌인 장애인을 괴롭히는 말을 내 뱉어 이를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이 야당대표는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는 장애인들의 시위를 맹비난 했다. 분명한 것은 시민들은 장애인들의 이 같은 시위에 대해서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이 말이 나온 지 얼마 안 돼 장애인이 지하철서 나오다가 휠체어가 뒤로 굴러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고는 지하철서 일어난 3번째 사고이다. 보통사람들은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야당 대표의 말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아가페, 참사랑을 몰각한데서 나온 말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하나님의 참사랑은 영혼의 열쇠이며, 인간다운 세상을 만든다. 사랑은 죽은 영혼을 깨우고, 잠든 영혼을 깨운다. 사랑은 누구나 갈망하고 사모한다. 사랑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이며, 삭막한 사회이다. 소망이 없는 사회이다.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완전한 합일에의 근원적인 사랑을 갈망한다. 사랑에는 에로스와 아가페, 무조건적인 사랑이 있다.

에로스는 그리스인들이 추구한 사랑이다.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대상에의 갈망이다. 지금 내가 갈망하는 것, 필요한 것,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추구이다. 에로스 사랑은 이상적인 인간, 고결하고 빼어난 인간을 추구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실현한 아가페 사랑은 그렇지 않다.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절대적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사랑을 통해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이 사랑은 예수님이 자신의 삶의 현장, 역사의 현장에서 문둥병자, 절음발이, 정신장애인, 소경 등을 고쳐주며, 몸소 실행한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또한 이를 제자들에게 교육했다. 이 사랑은 추한사람, 병들고 못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또 이 사랑은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 잃어버린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참사랑이다. 하나님의 참사랑은 복음(기쁜소식)이다. 오늘 이 시대 이런 사랑을 잃어버려 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온다.

인간은 하나님의 참사랑과 자유를 상실해,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사진은 양천향교 에스컬레이터 추락참사 서울시 공식사과 촉구 지하철타기 선전전)
인간은 하나님의 참사랑과 자유를 상실해,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사진은 양천향교 에스컬레이터 추락참사 서울시 공식사과 촉구 지하철타기 선전전)

못난이들의 아우성 소리를 듣고 함께 소리치자
잃어버린 하나님의 참사랑이 죽은 영혼 살린다
아가페, 장애인 등에게 자유·사랑의 기쁨 준다

인간의 주체성, 아가페에 의해서 형성

오늘날 산업사회,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그 사회에 가치 있고 유용한 사람이 아니면, 낙오되고 버림받는다. 그것은 실질과 능률을 숭상하는 오늘날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서 불가피한 일이다. 인간의 능력만을 존중하다가 보면, 인간 존재의 소중함을 잊게 된다. 한 인간이 능력 있고, 쓸모 있으면, 그 인간이야 아무래도 좋다. 얼마든지 다른 인간으로 대체 할 수 있다. 이런 사회적 원칙이 개인 관계까지 확대되면, 아내는 필요에 따라 남편을 바꿀 수 있다. 남편도 아내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인간의 삶의 가치는 아가페가 아니다. 현대인의 삶의 가치는 돈이다.

오늘 돈이 최고인 시대는 인간을 돈 버는 기계로 만들어 버렸다. 살기 위해서 일터로 나간 노동자가 주검으로 돌아온다. 육신이 멀쩡했던 노동자는 장애자가 되어 돌아온다. 이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아가페, 참사랑, 주체성을 잃어버린 결과이다. 인간을 능력과 소유에 따라 평가하면, 인간 자신이 아니다. 이 때 인간은 주제성을 상실한다. 주체성 없는 삶은 진실하지 않다. 진실이 없으면, 기쁨도 없다. 기쁨과 진실이 없으면, 그 사회와 가정, 그리고 교회는 균열이 생긴다. 인간의 주체성은 하나님의 참사랑, 아가페 사랑에 의해서 형성된다. 돈에 가치를 두는 오늘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하에서 주체성을 상실한 인간들은 혼자 살겠다고 아우성친다. 나를 열어 너를 받아 드릴 줄 모른다. 사랑과 기쁨이 없다. 버림받은 인간, 사랑과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장애인을 거부한다.

정부는 바뀔 때마다, 서울시장이 바뀔 때마다 장애인들의 생활권 보장을 위해서 일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선거가 끝나면 물거품이 됐다. 그러나 낳아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럴 때마다 장애인들은 하늘을 향해 호소한다. 집단행동을 벌인다. 이들의 아우성은 자신을 위한 장애인 편의시설이 조금씩 낳아졌다. 이것에 대해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장애인들의 생활 이동권 보장을 위한 길은 멀고 험하다.

정부와 시장이 바뀔 때마다 장애인들과의 약속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장애인들의 장애인 생활 이동권 주장은 당연하다. 이것은 이들에게 권리이며, 국가가 법으로 보장해 주어야 할 의무이다. 분명한 것은 소외된 이웃을 돌보지 않는 사회는 사회 전체가 장애자이다. 장애자를 괴롭히는 정치지도자는 장애인보다도 더 큰 장애자이다. 장애자를 비롯한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돌보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의 참사랑, 복음을 상실한 교회이다.

이런 타산적인 사랑, 조건적인 사랑은 소외된 이웃에게 자유와 기쁨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환멸을 일으키고, 갈증을 일으킨다. 이들의 삶을 곤궁하게 만든다. 타산적인 사랑은 장애인과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더 빈곤하게 만든다. 인로인해 사회와 교회는 병들어 간다. 사랑받고 보살핌을 받아야 할 장애인을 외면하는 사회와 교회는 성서에서, 예수님의 삶의 현장서 이탈했다. 예수님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가시밭길, 벼랑끝을 헤매신다. 장애인은 잃은 양 한 마리이다. 오늘 사회는 다수의 안전한 삶을 위해 소수를 희생시킨다.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한사람을 위해서 1천명이 수고를 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가페가 절실한 시대

이것은 소수의 자유를 박탈하는 강제적 장치, 법이다. 법이 소수의 인권을 짓밟으면, 그것은 무서운 흉기로 변한다. 소수의 장애인을 위해 다수의 시민이 불편을 느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법에 매몰된 야당지도자이며, 교회지도자이다.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는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켜야 한다는 원칙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산술적 계산으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다.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는, 남의 도움과 사랑없이 살아갈수 없는 소외된 사람이 조직과 공동체서 소외된다면, 남은 사람도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소수의 장애인을 그대로 방치하면, 이들을 하나님의 참사랑으로 돌보지 않는다면, 인간에 대한 형제애를 잃어버린 것과 다르지 않다. 형제애를 잃어버린 사회는 영적으로 병든 사회이다. 인간의 정신은 이미 닫혔다. 내 마음을 열어 너를 받아드리지 못한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런 사회는 닫혀 있는 사회이다. 닫혀 있는 정신은 사랑을 모른다. 치유도 모른다. 진정한 삶도 모른다. 형제애를 잃고 사는 삶이 행복 할리 없다. 싸움과 갈등, 고통만 따른다.

문제는 오늘 한국교회가 잃은 양을 그대로 방치한다는데 있다. 사실 한국교회는 교회 안에서 돈이 안 되는 교인은 소외될 수밖에 없고 소외되어 왔다. 돈이 있어야 사람구실을 하는 시대이다. 돈이 있어야 목사도, 장로도, 권사도, 안수집사도 될 수 있다. 믿음과 신앙으로 결정하는 시대는 옛 과거가 됐다. 분명한 것은 과거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 교회를 살찌게 했다.

이제 이들은 교회를 떠나 가시밭길, 벼랑 끝을 헤맨다. 이들을 위해서 교회가 관심을 갖는 일은 없다. 거지가, 아니 장애인, 정신적으로 장애를 가진 사람이 교회에 찾아오면, 대부분의 교회는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혐오를 준다는 이유로, 1천원짜리 한 장을 손에 쥐어주고 교회에서 내쫓는다. 이것이 교회이며, 사회이다. 우리 삶의 현장이다.

예수님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 오셨다. 이런 사람이 있는 곳이 예수님의 삶의 현장이다. 예수님은 이들과 함께 사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면서까지 이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이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예수님의 복음은 자신이 실현한 하나님의 참사랑에 관한 기쁜소식이다. 복음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보잘 것 없는 사람, 죄인을 주인으로 삼는 나라이다. 이들에개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상, 하나님나라에 대한 희망을 주었다. 이들을 하나님의 잔칫상에 초대하고 기쁨과 사랑을 나누었다.

하나님의 아가페가 지배하는 나라의 기쁜 소식을 소망케 했다. 결국 복음의 핵심은 아가페 사랑, 하나님의 참사랑이다. 인간의 욕망과 갈등으로 가득 찬 역사가 계속되는 한, 하나님의 참사랑, 복음은 없다. 서로 갈등등하며, 분열 할 수밖에 없다. 오늘 한국교회와 사회가가 하나님의 참사랑, 아가페를 잃어버려 장애인을 괴롭힌다. 간난하고 소외된 사람, 사회적 약자들은 더 이상 교회를 찾지 않는다. 그렇다보니 교회와 사회는 서로 반목하며, 나를 너에게 그리고 그에게 주고받지를 못한다. 성령을 주고받지 못해 웅덩이에 고인물과 같이 우리사회 곳곳은 병들어가고 있다. 썩은 냄새가 진동한다. 곪아터지기 직전에 와 있다.

돌로 만든 떡을 먹고 굳어진 마음

모두가 돌로 만든 떡을 먹고 마음이 굳어져 버렸다. 사랑과 기쁨을 주는 포도주도 떨어졌다. 그렇다보니 이 시대는 장애인,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감동, 진한 감동을 잃어버렸다. 축구, 야구, 농구 등 스포츠에 흥분하고, 텔레비전에 감동하면서, 장애인, 노숙인 등 보잘 것 없는 이웃의 기쁨과 아픔에 대해서는 함께 울고 기뻐하지 못한다. 모두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돌로 만든 떡을 먹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며 사랑했던 장애인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업신여긴다. 이들을 괴롭힌다.

하나님의 뜻, 예수님의 행동, 삶의 현장이 어찌되었건 모두가 먹고 보자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악마의 주장이며, 늘 사회를 병들게 한다. 야당지도자와 교회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장애인과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 호소한다. 그러나 인간들은 소유욕과 탐욕에 길들여져 이 소리를 듣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을 어지럽게 만든다. 이 사회에 정신적인 포도주, 윤리와 도덕이 자리를 잡았다면, 하나님의 참사랑이 실현되었다면, 장애인과 노숙자 등 보잘 것 없는 사회적 약자들의 삶, 우리들의 삶은 훈훈하고 생명이 넘쳐흘렀을 것이다. 사랑을 주고받는 사회가 됐을 것이다.

분명 이 사회는 하나님의 아가페, 복음을 잃어버린 사회이다. 그렇다보니 분열과 갈등의 늪만 깊어가는 사회가 됐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아가페, 사랑 속에서만 자신을 나타낸다. 인간들도 자신의 깊은 영혼을 드러내는 것은 아가페, 사랑을 통해서이다. 우리는 아가페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인간을 만난다. 부활의 계절, 생명의 계절, 부활절을 보내고 420일 장애인의 날, 교회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함께 사랑과 자유를 주고받았다는 이야기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안타깝다.

요한1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했다. 장애인이나, 가난한 자나, 잘난 인간이나, 장애인을 괴롭히는 야당지도자나, 권력을 쫓아다니는 기독교 무당이나,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즉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인간도 사랑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때문에 장애인이나, 잘난 사람이나, 가난한 자나, 모두가 사람대접을 받으면서 살아야 할 권리가 있다. 사랑은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사랑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고아가 왜 불쌍한가(?) 사랑을 주고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참사랑을 잃어버린 시대

이것이 바로 성서가 인간 모두에게 가르치고 있는 진리이다. 텔레비전 연속극은 모두 사랑을 노래한다. 가수들도 모두 사랑을 노래한다. 그런데 왜 이 사회를 두고 사랑을 상실했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인간 모두가 조건적인 사랑, 타산적인 사랑을 노래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인간에게 자유와 기쁨을 가져다가 주지를 못한다. 또 이런 사랑은 웅덩이에 고인 물과 같아서 인간의 영혼을 더 갈증 나도록 만든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계산하지 않는 아가페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가르쳐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삶의 현장서, 역사의 현장서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도 이런 사랑이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길들여진 이 시대의 인간들은 재산을 탕진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던 아들이 돌아오기를 대문 앞에서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 잃어버리지 않은 아흔아홉마리를 그대로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가시밭길과 벼랑 끝을 헤매는 목자의 사랑, 십자가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내어준 그리스도의 사랑을 잃어버렸다. 이런 사랑이 아사되면서, 장애인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아우성, ‘한의 소리는 하늘에 사무친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아가페만이 죽은 영혼을 살릴 수 있다.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 하나님나라를 대망케 한다. 그리고 남의 가슴에서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아가페는 나의 가슴에서 너의 가슴으로, 그리고 그의 가슴으로 시냇물처럼 흘러야 건강한 사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실현된다. 헌데 이 시대의 인간들은 아가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인간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죄인이 되었다.

사랑하며 보살펴 주어야 할 장애인을 괴롭히기 때문에 이 사회는 범죄자들의 소굴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돌로 만든 떡을 먹고 마음이 돌이 되어 부모가 장애인 아들을 죽였는데도, 무연고 노숙자가 외롭게 홀로 죽었는데도, 열흘이 지나도 모른다. 하나님나라의 주인인 아이가 목사아들과 딸에게 입양돼, 학대로 죽었는데도, 신학대학교의 교수 아빠와 계모에 의해 중학생이 죽었는데도, 죄의식을 전혀 갖지 않는다. 오히려 형량을 줄여보려고, 탄원서를 만들고, 비싼 변호사를 선임한다.

이것이 인간이다. 우리는 분명 포도주가 떨어진 시대에 살고 있다. 자식이 부모를 죽여도, 장애인이 에스카레이트를 타고 오르다가 뒤로 굴러 죽어도, 함께 아파하지도 울지도 않는다. 오히려 장애인을 괴롭히는 말들을 쏟아내기에 바쁘다. 우리는 포도주가 떨어진 시대에 살고 있다. 모두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자. 그러면 사랑과 자유를 함께 누리고, 보살펴 주어야 할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소리치는 아우성 소리를 듣고, 함께 소리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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