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헌 철 목사
서 헌 철 목사

새벽마다 요란하게 울어 동이 트는 것을 알려주는 장닭이 있었다. 주인은 그 장닭이 기특해서 매일 아침 들에 나갈 때마다 콩 한 줌을 상으로 뿌려 주었다. 그런데 어느날 여느 때처럼 콩 한 줌을 뿌려 주었는데 웬일인지 장닭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주인이 이상하게 여겨 왜 먹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장닭이 말했다. “늘 이 따위 콩만 주니까 그렇죠, 새벽하늘을 환하게 밝히는 건 바로 나란 말예요, 내가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있나요? 농사를 못 지으면 가을걷이도 못 하고..... 굶어 죽을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나는 당신의 생명의 은인인 셈이니 최고로 맛있는 걸 주세요” 주인은 그날 밤 아무말 없이 장닭의 뾰족한 주둥이를 노끈으로 꽁꽁 묶어 놓았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제시간에 일어나 농기구를 들고 밭에 나가면서 장닭에게 말했다. “오늘은 네가 울지 않았는데 어떻게 날이 밝았지?” 장닭은 부끄러워서 한마디 대꾸도 못 하고 얼굴을 붉혔다. 그때 이후로 장닭의 벼슬은 맨드라미처럼 빨간색이 되고 말았다(출처 : 감동을 주는 바보).

“분수를 모르고 교만함으로 하늘만 올려다보고 사는 사람은 개천에 빠지기 쉬운 법”이라는 교훈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려 본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 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3-16).

  그런데 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소금이 된 맛을 보이지 못하는 것일까? 이는 탐욕이 버려지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또한 그리스도인의 빛 된 삶이 선한 행실로 보여 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겸손과 온유로 하지 않고 공로만을 들어내어 자신의 위용을 나타내려는 데서, 장닭과 같이 분수를 모르는 자들로 취급되는 것은 아닐까?

가정의 달을 턱 앞에 맞이하며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기도하고 있을까? 작금에 방영되고 있는 ‘그린 마더스 클럽’이라는 드라마는 작금의 강남과 같은 동네? 거주지? 명문대? 유학? 직업? 돈? 아이들의 영재성? 부모의 교육열, 심지어 할머니의 손자에 대한 학구열 등 치열한 교육 경쟁 속에선 그 어디에서도 아이들은 친구와 교제하며 노는 진정성, 동심이 짓밟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상위 0.01%의 아이도 엄마들의 눈에 보여졌을 때만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인정과 짓밟음 등, 부모들의 망가진 인성은 물론 아이들을 AI와 같이 맏르어 가려는 현실 세계를 그려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엇이 부모 된 마음이며, 무엇이 아이들의 성장통일까? 또한 사회는 무엇을 요구하기에? 어떻게 살아야 하기에? 고민하면서도 실상은 외면하고픈 위선? 이러한 것에서 미래란 어떠할 것인가?

 자신들의 과거, 약점 등은 철저히 가려지기를 원하면서 타인의 과거, 약점 등은 세밀하게 찾아내려는 목적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또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려는 것도 정상에로의 회복을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왜곡되고 숨겨진 외식의 외투를 벗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비극을 불러들이는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가정의 달을 맞이하며 상위 0.01%의 축복을 기도하기 전에 우리는 과연 ‘소금’인가 ‘빛’인가 되새겨 보자.

한국장로교신학 연구원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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