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보 연 교수
장 보 연 교수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완전히 받아들여지고, 상대를 온전히 받아드려지기를 원한다. 모든 인간의 삶의 밑바닥에는 근원적인 합일에의 갈망이 있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이런 갈망을 충족시켜주기 위해서 존재한다. 무당들은 닫혀진 자신의 벽을 깨트리고, 몰아적인 상태에서 다른 혼백들과 어루러지게 한다. 

불교는 자신의 욕망과 어리석음, 분노에서 해탈하여 무아지경에 이르게 한다. 자신에게서 벗어나 거침없이 자연과 하나가 되려 한다. 도교는 인위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자연과 하나되는 생활을 하려고 한다. 기독교는 나와 하나님,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 사귐 속에서 하나되려고 한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가로막힌 담을 허물고 화해를 추구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벽을 허물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 무교나, 동양종교와 다른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합일을 추구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 속에 성적인 욕망을 주었다. 성적 욕망은 남자와 여자가 하나로 결합된다. 결혼을 통해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살도록 한 것은 위대한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이며 축복이다. 

하나님은 아담의 일을 거둘 짝을 만들어 주려고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집짐승을 지었다. 아담은 각기 짐승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이름을 짓고 부른다는 것은 서로 관계를 맺고, 의사를 소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담은 이 짐승들에서 자신의 짝을 찾지 못했다. 아무리 이름을 부르고, 애정을 쏟아도 인간은 짐승의 짝이 될 수 없다. 

오늘날 인간들은 애완동물에 집착한다. 이것은 진정한 인간관계의 상실을 그대로 나타낸다. 인간관계가 상실되고, 파괴되었기 때문에, 참된 인간관계를 이룰 수 없다. 때문에 인간은 병적으로 애완동물에 집착한다. 동물을 사랑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면서 애완동물에 매달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애완동물에게 냉난방장치를 해 주고, 아프면 자가용으로 병원에 간다. 이런 정성과 노력을 고통 받는 이웃에게 쏟지 못하는 것은, 이웃에게 이르는 사회적인 통로가 막혔기 때문이다. 인간성이 부패하고,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짐승들이 아담의 반려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담의 갈빗대를 뽑아서 여자를 만들어 주었다. 

모든 짐승과 아담은 흙을 빚어서 만들어 졌다. 하지만 이브만은 흙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인간의 갈비대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아담과 똑같은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이 만든 여자를 처음 보자 아담은 기뻐 이렇게 외쳤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녀 사이의 깊은 갈망, 본능적인 그리움은 개인적으로는 쾌락의 충족일는지 모른지만, 인류의 충족을 유지하는 방편이며, 인류의 생명을 보존하는 수단이다. 남녀의 애정은 죽음보다 더 깊다. 모든 젊은이들이 서로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여 자녀을 낳음으로써 죽음을 넘어서서 생명을 실어 나른다. 남녀의 사랑은 선하고 아름답다.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창조적 섭리에 속한다.

그러나 인류가 타락하면서, 지배욕과 소유욕의 노예가 된 이후, 남녀의 사랑은 부끄러운 것, 추한 것이 되었다. 타락 전에는 알몸으로 지냈어도,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타락한 이 후 부끄러워 무화과 잎으로 앞을 가리웠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적대 관계가 수립되고, 남녀 지배의 종속관계가 성립됐다. 

때문에 인간의 천진난만한 마음은 사라지고, 긴장과 대립과 불안과 갈등이 생겨났다. 자신을 내 맡기고 상대를 온전히 받아드리는 마음이 사라졌다. 상대를 의심하고 평가하고 비교하고 자신을 숨긴다. 일편단심은 사라지고, 내 마음은 깊은 분열에 빠졌다. 

굿-패밀리 대표•개신대 상담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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