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유대인의 최고 정치지도자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사람은 죽어야 성령으로 거듭난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한 말은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공통된 질문이다. 인간은 항상 그 수준에 머물러 있다. 답을 정해 놓고 질문을 한다. 오스트리아의 연방총리 카를 네하머는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푸틴의 심리상태를 논했다. 푸틴은 힘의 평화를 내세워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끝까지 끌고 가겠다는 속셈을 드러내고, 이 전쟁에서 물러서면 서방 국가들에게 끌려 다닐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에 참여 할 수 없다고 교육했다. 그렇다 죽은 삶을 사는 자만이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 할 수 있다. 헌데 오늘날 인간 모두가 죽은 삶을 사는 자가 얼마나 될까(?) 참 아이러니하다. 이순신 장군도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했다. 에스겔서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말이 아니다. 바빌론에 끌려간 이스라엘의 민족은 죄를 많이 지어서 끌려간 정치지도자, 종교지도자 등 위선자들이다.

오늘 가난하고 소외된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일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바벨론에 끌려간 이스라엘의 정치지도자, 종교지도자들의 죄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다. 오늘 대한민국의 일부 정치지도자, 학자, 종교지도자, 기득권들은 바벨론에 끌려간 위선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자녀를 편법으로 대학에 입학시키고,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많은 부를 챙긴다. 이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보잘 것 없는 국민을 위해서 일한다고 떠들어 댄다.

에스겔서 1114-30절의 말씀은 하나님은 바벨론에 끌려가지 않은 인간을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소가 되어 주겠다고 한다. 이들을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겠다는 것이다. 원한과 증오를 갖지 말라고 한다. 남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 정치인들을 보면, 국민을 위한 정치인이 보이지를 않는다. 이들은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자신만 살기 위해 허세를 부린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통한의 소리, 살기 위해서 노동현장에 나갔다가 주검으로 돌아오는 노동자들의 한의 소리, 부모의 학대로 죽임을 당한 어린 아이의 절규, 전쟁의 참화 속에서 예수님의 평화를 갈구하는 이웃의 아우성을 듣지 못한다.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모두가 주변을 맴돌며, 자신의 안위를 추구한다. 또한 이익을 챙기기에 바쁘다. 국민을 위해서 일하겠다는 사람들은 돈을 쫓아다니며, 하나님의 자리를 돈으로 대치시키기에 바쁘다. 이것은 종교지도자들도 다르지 않다.

또한 맹목적으로 강대국을 섬기며, 대한민국의 운명을 강대국에 내 맡긴다. 기업에 몸담으면서, 공직에 있으면서, 끈끈한 가족애를 쌓았다. 그렇다보니 이들은 협잡, 명예, 돈을 쫓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대기업서 마련해준 아파트에 살면서, 로펌으로부터 연본 20억을 받으면서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죄를 짓고도 이를 깔아뭉개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상황서 경제부총리를 지낸 모 인사는 로펌, 기업의 고문, 사회이사 청탁 등등 부총리 급여 10배를 준다고 해도, 이를 거부했다는 이야기는 훈훈하다. 분명한 것은 인간은 죽어야 한다. 바울은 분명하게 말한다. “죽지 않으면,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수 없다”(로마서 63-14) 나 스스로 나를 고문하고 새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예수님 안으로 끌려들어가 부패한 인간을 죽게 하고 질식시켜야 한다.

성령의 도움 없이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성령의 도움 없이 내 안에 죄를 통제 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 모두는 하나님으로 도움을 받아 인정받고 싶은 욕망, 인간의 힘으로 끊을 수 없는 욕정,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끊어내고,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돼 새 인간으로 거듭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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