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당한 독수리

새장을 부수고
창공을 훨훨 날고 싶다

수면 위를 맴돌던 반딧불이
앞날을 밝혀주며 길을 안내해도

날개 부러지고 발톱 빼앗겨
차가운 쇠창살만 만질 뿐

풀 한포기 감동을 주는 사막에서
반쯤 일어섰다 주저앉으며
죽은 고기들 수습할 수 없다

- 『기독시문학』 2020년호에서
* 하옥이 
 월간《신문예》주간, 도서출판《책나라》대표.
시집 : 『비너스의 태몽』 『구름 위의 방』 『숨겨진 밤』 등
수상 : 황진이문학상. 황희예술문학상 

정 재 영 장로
정 재 영 장로

인간만이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한다. 이 작품은 창공을 날며 산짐승을 먹이로 삼는 새 중에 힘이 가장 센 독수리가 철장에 갇혀 죽은 고기를 상대해야 하는 존재 양태를 들고 있다. 모든 동물을 다스리는 인간도 새 세계의 독수리와 같다. 즉 비유로 동원한 독수리는 시인의 실존 상황이다. 철장 안에 갇힌 독수리로 은유하고 있는 목적은 보이지 않는 관념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형상화란 비가시적 원관념을 가시적 보조관념으로 바꾸었다는 의미다. 

 힘을 잃고 갇힌 상황은 벽이 아닌 창살 안이다. 단절되었으나 하늘이 보이는 단절을 말한다. 밖이 보이는 새장 안에 갇혀 있는 곳은 외부와 내면의 경계 지점이다. 여기서 라캉이 말하는 탈경계를 시도하는 현대인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또한 하이데거의 현존재 위치를 보여준다. 현존의 위치란 물리적인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세계 속의 다른 존재자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Da-Sein이다. 즉 하이데거의 ‘Da(거기)‘는 철장 속으로, ’던져진 존재(Sein)‘는 힘을 상실한 독수리다. 창공과 단절된 독수리를 들어 인간의 한계성을 보여줌으로 현존재를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기독인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조직신학의 유기론(遺棄論)을 잘 해석하고 있다. 유배당함은 피동적 상태다. 죄악 속에 갇힌 존재, 독수리는 독수리이듯 인간은 인간이다. 여전히 창조적 흔적(그림자)이 남아 있는 인간론을 확인해준다. 인간은 하늘이라는 낙원에서 쫓겨 내던져진 존재다. 쇠창살 안이 실낙원이다. 인간은 신적 능력을 상실하여 쇠창살 안에 갇힌 독수리라는 의미다. 

 구조주의로 작품을 읽어 본다면 융합시(17세기 형이상시학파에서 유래된 현대시의 기법 중 하나)의 특징인 이질적이고 상반된 이미지를 동원하고 있다. 쇠창살과 창공, 날고 싶은 본태적 욕망과 현실에 갇힌 부자유, 부러진 날개와 상실한 발톱으로 일어셨다 다시 주저앉는 이미지 등은 양극화를 통한 컨시트의 구성을 위해 의도적(고의적)으로 만든 시적 구조임을 확인시켜준다. 그 결과 문학의 순수한 통징(痛懲)을 얻는다. 이런 면에서 17세기 존 던 등의 형이상시에서 유래하여, 20세기 신비평학파의 주류를 이루었던 시인과 평론가들 주장의 타당함을 극명하게 변증해주고 있다.                                    
전 한국기독교시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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