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가 미국을 우상으로 삼는 이유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20일과 21일 양일간 방한, 윤석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문제인 전 대통령과도 전화통화로 만났다. 미국 대통령을 우상화 하는 한국교회, 서양의 문화가 기독교의 이데올로기로 변질된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 지금까지 잘못 기록된 한국기독교역사를 바로잡고, 민족교회로서의 현재 한민족의 문제 상황과 민족분단에 직결된 교회의 문제들을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다시 제기되고 있다.

잘못된 한국교회의 문제들은 한국의 교회 사가들에 의해서 규명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보니 한국교회는 영미의 정통주의신학과 근본주의신학을 추종하며, 기독교를 자본주의·식민주의·팽창주의에 빠지게 했다. 분명한 것은 기독교는 자본주의·식민주의·팽창주의와 동일시 할 수 없다. 미국을 비롯한 서양의 국가들이 내세워 이웃국가를 괴롭히는 자유와도 동일시 할 수 없다.

기독교 선교는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초월하는 복음(기쁜소식), 하나님의 구원을 주제로 삼아야 한다. 서양의 기독교는 19세기 자본주의·식민주의·팽창주의의 조류에 따라 한국에 들어왔다. 선교사들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또는 알게 모르게 이러한 팽창주의와 식민주의에 협조했다. 선교사들은 서양의 자본주의·자유주의의 문화를 대변했고, 피선교국의 정보를 서양의 자본가들에게 제공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부정할 수 없다.

이를 통해 동양 지배의 길을 평탄하게 만들어 주었다. 한국 기독교는 처음부터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문화의 배경과 기반에서 성립됐다. 또 이를 바탕으로 크게 성장해 왔다. 한마디로 서양문화의 예속의 길을 걸어 왔다는 얘기다. 오늘 한국교회가 국민에 의해서 선출된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비판하면서, 미국대통령 트럼프를 연호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강대국 대통령을 우상으로 섬기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한국의 기독교사가들은 민족교회론을 제창하면서도, 서양기독교 선교와 자유주의 문화와의 결탁에서 초래된 문제점을 전혀 보지를 못했다는 지적이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개화사상과 기독교의 전래에 대해 봉건주의 극복에 있어 결정적인 계기를 가져다가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선교에 최대한 활용했고, 활용하고 있다. 개화사상은 서양의 자본주의·자유주의의 모델로 근대화의 사조였다. 꼭 필요했다.

선교사, 복음을 상실한 황금에 눈이 먼 장사꾼(?)
기독교 선교 침략세력과 결탁돼 순탄하게 방방곡곡에 개척

장사꾼으로 변질된 선교사

그러나 그것이 서양 침략세력의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망각했다. 기독교 선교는 민족의 자주적인 봉건체제 극복과 근대화의 잠재력을 꺾어버린 침략세력들의 정신적 지주가 됐다. 한국교회는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한국교회의 일부 목회자와 이들로부터 제국주의적 신앙교육을 받은 교인들은 일본을 통해 한국에 들어온 영미의 기독교 선교 때문에 대한민국이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그리고 서양의 문화와 식민주의·제국주의·팽창주의 신학을 비판 없이 무조건 맹종한다. 한국선교 130년이 지난 오늘 선교사들의 형태는 오늘의 상황서 재조명되고,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이것은 피압박민족에게 있어 복음이라고 할 수 없다. 복음은 하나님의 참사랑이며, 아가페이다. 복음은 하나님나라 구원을 주제로 삼아야 한다.

헤링톤의 저서 하나님·맘몬(황금일본는 알렌 박사의 활동무대로서 식민주의적 관점을 그대로 드러낸다. 헤링톤은 이 책에서 알렌을 비롯한 침략세력들과 이것들에 대해 수명을 다한 이씨 왕족과 한민족의 상황을 서술했다. 헤링톤은 기독교선교에 있어 개화파와 일본이라는 두 세력이 선교사들의 활동을 유리하게 해 주었다. 이 두 세력은 선교가 개화운동에 힘이 될 것이라는 점과 한국을 서양문화에 접하게 하리라는 점에서 일치했다.

서양문화에 의해서 신흥세력으로 등장한 일본은 한국을 일본에 귀속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1876년 개항이후 적극적으로 추진된 개화운동은 서양의 기술문명을 일본을 통해서 받았다. 이 운동은 봉건체제 해체과정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국주의·식민주의 세력들의 침략의 음모를 파악하지는 못했다. 방어 할 수도 없었다. 기독교는 개화의 추세에 따라서 더 나아가 개화의 정신적 지주로서 급속도로 한민족에게 수용되기 시작했다.

근대화의 민족적 주체세력은 침략세력들 아래서 분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독교 선교는 침략세력들과 결탁돼 순탄하면서도, 빠르게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 나갔다. 이광린은 개화파의 기독교 신앙은 견고했다그래서 민족적 수난 속에서 교회를 반석 위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고 번역서 개화기의 한미관계(해밍톤 저)에 적었다.

영국 성공회 선교사 휴 밀러는 결국 나라가 심난하면, 선교사업에 도움이 된다. 좋은 정부에서는 서양의 학문이나, 과학의 회의론과 불가지론 등을 수반하게 된다고 했다. 이것은 오늘 한국교회 목회자의 입에서 자주 회자되는 말이다. 휴 밀러가 말하는 학문과 과학은 서양의 지배수단인 동시에 기독교선교의 수단이었다. 해밍톤은 선교사들은 미국문명을 가르치고 나서 기독교가 바로 서양문명의 기본이라는 것을 심어주려고 노력했다고 자신의 저서에서 지적했다.

그들로 잘사는 생활양식에 대한 호기심과 선망에 찬 한국인에게 보여주려고 과시했다고 자신의 저서에 적었다. 선교사들은 한마디로 장사꾼이었다. 이들은 양품시장을 열었다. 그리고 상품선전에 힘썼다. 시장에 상품을 공급했다. 어떤 선교사는 원산에서 과수원을 경영했다. 어떤 이들은 서울서 하숙과 여관을 겸해서 경영했다. 어떤 선교사는 타운젠드회사에 정보를 제공하여 사장 개척을 알선해 주고, 일정부분 이득을 챙겼다. 알렌, 언더우드, 그레함 리, 모펫 등의 형태를 보면, 장사꾼으로 변질된 선교사들의 형태는 분명해진다.

강대국을 우상으로 섬기는 한국교회

한국교회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언더우드는 석유, 석탄, 농기를 수입했다. 1884년 한국선교의 전초기지를 마련하겠다고 한국에 온 알렌은 황실의 외교고문관으로 시작하여 미공관의 외교관이 되었다. 그는 1897년부터 1903년까지 최초의 전차노선, 최초의 도시발전소, 상수도, 전화시설, 현대식 관청건물 등의 사업권을 얻어내 미 사업가들에게 알선하는 중개업자였다. 알렌은 한국내의 중요한 모든 재정사업은 우리들의 것이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그의 선교직원이었던 그래함 리와 모펫은 압록강 채벌권을 얻어내 3천 그루의 나무를 벌목했다. 그런데 한국정부가 세금을 요청하자, 그래함 리는 그 요청이 불법이라며, 생떼를 섰다. 해밍톤은 이런 알렌에 대해 알렌의 제국주의적 외교에서 얻어진 가장 멋들어진 것 중에 하나였음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고 지적했다. 알렌은 운산금광을 23년간 운영권을 획득, 상상 할 수 없는 이득을 챙겼다. 물론 한국인 노동자들에게는 오늘날로 말하면, 최저임금도 안 되는 임금을 지급했다.

한마디로 한국은 제국주의, 지배의식에 꽉 찬 알렌의 활동무대였다. 그는 한국을 보잘 것 없는 곳이라고 경멸하면서, 자국의 이익을 철저하게 챙겼다. 교회가 알렌 선교사를 소개하는 것과 드라마에 비쳐지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본다. 그리고 한국은 자치능력이 없고 과거에 그랬듯이 종주국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1897113일 미국국무부차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한국인들을 인디언과 같이, 흑인보다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대다수의 선교사와 일반 서양 사람들의 의식을 그대로 대변한다. 알렌의 상업행위와 제국주의적 지배의식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알렌은 선교사 이전에, 외교관이다고 변호하기에 바쁘다. 알렌의 지배의식과 편견은 영미선교사와 서양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한국 신민지화, 한국 침략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기독교선교의 정교분리정책

일본 제국주의 승리 자체가 서양 제국주의·식민주의와 결탁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영국과 미국 특히 미국의 배경에서 얻어진 것이었다. 1902년 영일동맹은 두 나라의 제국주의 식민주의적 이권을 위한 동맹이었다. 러일전쟁 당시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전쟁비용을 조달해 주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의 승리에 대해 일본은 우리들(미국인들)을 위한 싸움을 해 주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승리에 대해 기쁘다고 말했다.

1905년 일본의 을사보호조약에 의한 한국 국권과 외교적 박탈도 미·일의 식민지밀약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가스라-테프트조약이 바로 그것이다. 1905729일 일본의 수상 가쓰라 다로와 루스벨트의 특사인 테프트 사이에서 제국주의·식민주의 홍정이 비밀리에 체결되었다.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고 욕심내지 말 것이며, 일본의 한국지배에 미국은 간섭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이 밀약이 체결된 이후, 미국은 한·미수교를 일방적으로 폐기해 버렸다. 그리고 미국은 한국 내 공관을 철수했다. 미국 전 대통령 트럼프는 미국과 한국은 혈맹이라고 말하면서, 일본 아베정부의 경제보복에 맞서 싸우는 대한민국 국민을 아랑곳 하지를 않았다. 중재자·화해자의 역할을 상실했다. 오히려 일본 아베정부와 한국정부 간 싸움을 부추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국교회 다수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미국의 입장에 서서 일본 아베정부의 경제보복에 맞서 차분하게 대처하는 대한민국 정부를 흠집 내기에 바빴다. 침묵으로 일관했다. 영미선교사의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는 강대국 미국의 이러한 숨은 음모를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변명해 주기에 바쁘다. 이런 교회의 모습에 염증을 느낀 일부 교인들은 교회를 이탈해 교인이기를 스스로 거부한다.

오히려 한국교회 목회자와, 이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교인들은 미국 강대국을 우상으로 섬긴다. 어느 교회의 권사는 일본대사관 앞 고난의 어머니 상징인 소녀상 앞에서 아베님 잘못 했습니다란 팻말을 들고, 국민들의 정서에 반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이 여성은 국회의원선거서 모정당의 비례대표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 이것이 한국교회 목회자와 교인들의 의식이라는데 안타깝다. 이는 결국 선교의 자원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고난당하는 민족을 몰각한 선교는 한마디로 실패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구령운동, 민족위기의 도피처였나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지배가 노골화되면서 기독교선교는 정교분리정책을 제창하면서, 그러한 국제적 불의에 대한 책임을 모면 할 길을 열기도 했다. 이는 결국 일본 식민지세력에 협력해서 살아남는 것이었다. 정교분리정책은 이토의 식민정책과 일치됐다. 1901년 선교사들만의 기구인 장로교공의회는 교회와 국가의 상호불간섭이라는 취지문을 전국교회에 배포했다. 이러한 선교정책은 일본의 정치탄압으로부터 교인들을 보호하고,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호한다. 한마디로 언어도단이다.

복음은 정치를 초월한다. 그러나 이 초월성은 불의한 정치상황을 묵과하고 도피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넘어서고, 극복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치와 종교는 분리될 수 없고, 분리해서도 안 된다. 당시 기독교선교는 불의한 제국주의·식민주의 세력들과 결탁되어 있었다. 선교사들은 일본의 식민지 독점권을 허용하고, 이러한 사실을 복음의 영적진리라는 이름 아래 은폐하고 말았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치명적 반민족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로 인해 급속도로 번져 나갔던 기독교선교는 지식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사회주의,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다. 감리교는 그 어느 교단보다도 통감부 아래서 이토의 정교분리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존스와 스크랜톤은 추상적인 복음선교, 영적구원만을 강조해 한민족의 민족의식을 깔아뭉개 버렸다.

선교사들은 정치적인 사건을 떠나 한국인민의 도덕적 및 영적인 고양에 전적으로 힘쓰는 것을 행동지침으로 삼는다

이 말은 한마디로 감리교의 선교가 영적계몽과 교육운동이 얼마나 비역사적 책임회피였던가를 그대로 드러낸다. 당시 선교사들은 1905년 원산의 부흥회를 시작으로 평양에서 대부흥회가 열렸다. 이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이를 한국교회는 평양대부흥운동이라고 이름을 붙여, 한국선교 130년이 지난 오늘도 재현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는 이를 교회부흥의 발판으로 삼고 있다.

이를 위한 기념식도 대대적으로 가졌다. 이 부흥운동의 만민구령운동은 민족의 위기에서부터의 도피처를, 민족의 위기와 상관없는 정신적인 위로를 제공했다. 그러나 많은 지식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결정적 요인이 되기도 했다. 감리교의 추상적인 구령운동은 침략세력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서양문명과 기독교의 문제에 대해 알 길 없었던 무지한 백성은 이러한 상황을 분별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구원을 주제로 삼은 복음을

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심령부흥운동은 기독교선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문제의 올바른 파악과 참여, 해답을 위한 정신적 계기가 될 때에 역사적 타당성의 의미를 갖는다. 이토는 일본과 한국 감독이었던 헤리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정치의 사건은 불초 본인에게 맡겨주고, 금후 조선에 있어서 정신적 방면의 계몽교회에 대해서는 원컨대 귀하 등이 그 책임을 맡아 주시오. 이렇게 해야만 참으로 조선인민을 유도하는 사업은 완전하게 이룰 것이오

정교분리정책은 헤리스, 존스, 스크랜톤 등 감리교 선교사들에게 아주 용이하게 수납되었다. 감리교의 정신적 문화와 교육사업은 한민족의 자유와 주체성 박탈을 무마해 줄 수 있었다. 장로교의 순수 복음선교도 그러한 정치적 불의를 은폐시키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 일본은 정치적 불의를 은폐시키려고 기독교에 자금을 지원했고, 1910년 한국 목사들을 일본으로 초청했다. 많은 목사들이 이 초청에 응했고, 일본 조합교회의 한국진출의 길을 열어주었다.

한마디로 기독교의 정신적 보편주의가 오용되었다. 이것은 정치적 불의에 직면한 일본의 지배세력이 불가피하게 일어난 갈등을 무마시키는 이데올로기가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헐버트는 일본 제국주의·식민주의의 죄악과 조선민족의 억울한 상황을 서양에 알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허사였다. 미국을 위시한 서양세력 자체가 일본 제국주의·식민주의의 모체였으니 그것은 당연했다.

헐버트는 백성들과 관련된 것이 모두 정치적이다고 역설했다. 그는 세계에 대해서 악의에 찬 외세에 시달림을 받으며, 정당한 평가를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변호했다. 그 민족의 종말을 기록했다.(1986년 박순경 저 한길사 민족통일과 기독교 참고). 3.1만세운동 직후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 총독은 총독부에 종교과를 설치하고, 일본의 웰치 감독, 스미스, 브로크맨, 아펜젤로 등과의 협조를 강구했다.

미즈노 렌타로 경무총감은 선교사 초청연회에서, 선교사들의 일본 총독부 협력에 높이 평가하고, 조선인을 일본인답게 교육시키는 것과 일본 관헌과 솔직해지고, 친밀해져 오해나 잘못이 없도록 하자는 것을 당부했다. 이러한 일본의 회유책은 효과적이었다. 친일선교사들은 조선독립의 불가론을 공헌했다. 웰치 감독은 사이토가 기독교정신의 현시자라고 극찬했다. 웰치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정부로부터 훈장 3등급을 받았다.

그는 1924년 귀국기자회견에서 조선인은 일본지배아래 있는 것이 행복하다”, “조선인은 독립사상을 포기했다고 까지 말했다. 이는 사이토의 문화정책이 바로 서양의 기독교문화정신과 합일을 이룬 결과이다. 박순경 박사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러한 오판은 바로 서양의 지배문화와 일치화된 기독교 선교의 이데올로기를 단적으로 반증해 준다고 비판했다.

이런 비판은 한국교회가 기독교선교 이래 지금까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고쳐나갈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이제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서양기독교를, 이데올로기로 삼은 기독교선교에서 해방돼 하나님의 구원을 주제로 삼은 복음을, 하나님의 참사랑, 아가페를 이 땅에서 실현해야 한다는 지적의 목소리를 겸허하게 받아드려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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