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호관 목사
 한 사람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 교회 안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요즈음 세상이 하수상하여 참 교회를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고들 한다. 아름답다 못해 화려하게 꾸며진 예배 공간, 장애우까지 배려한 사용상의 편의성을 100% 충족시키는 최고급 예배당은 많은데 참 교회는 드문 세상에서 살면서 고민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간교한 사단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해서 믿는 자라도 넘어지게 하려고 유혹하는 간악한 일을 쉬지 않는다. 참 교회는 세 가지 선명한 표지를 고백한다.

첫째는 말씀(진리)의 신실한 선포요, 둘째는 성례의 정당한 집행이며, 셋째가 권징의 적절한 시행이다. 강단(설교)이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그런대로 명맥을 이어 가고 있다. 설교를 중단한 교회는 아직 없지 않은가? 성례 역시 정당하게 집행되고 있다. 세례식은 때를 따라 치러지고 있으며 성찬식은 그 어느 때보다 호사스럽게 발전(?)시켜서 집행하고 있다. 잔과 주전자며 떡 그릇까지 성찬식에 사용하는 모든 집기들이 황금빛으로 번쩍인다. 그리고 잘 꾸며 입은 집례자의 의상은 옛날 제사장들의 복식에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다. 금 빛 잔을 닦아 챙기고 간수하는 일마저 힘이 든다고 일회용으로 바꾼 교회도 있단다.

이유인즉 위생문제를 고려해서 그렇게 한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회에서 권징이 흔적을 감추었다. 교단마다 헌법이 있다. 그 헌법은 신조 교리, 정치, 권징조례, 예배모범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중에 권징조례가 언제부터인가 사문화되었다. 교회에서 권징을 적절하게 시행하는 것은 교회의 순결함과 거룩함을 보존하도록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은총의 규례이다. 어떤 사람이 진리에서 떠나 교회를 어지럽히고 더럽혔다면 교회는 그가 죄를 뉘우칠 것을 성경적으로 권면하고,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어 교회로 돌아오게 할 목적으로 적당히 시벌하는 것이다.(마18:15-20) 그러므로 권징은 사법적인 처벌은 아니라도 성도를 올바로 세워서 생명으로 나아가도록 교회가 도울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인 것이다. 바울 사도가 당시 고린도교회가 적절한 권징을 시행하지 않고 하나님 없는 재판관의 판단을 받는 것에 대해서 심히 꾸짖고 있음을 고린도전서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언제부터인가 적절한 권징을 통한 조정이나 판단 받는 것을 포기하고 우선 경찰서를 찾고 변호사와 면담을 하고 고액의 수임 비에 성공사례비까지 얹어 주면서 법원의 문을 두드리는 실정이다. 권징의 부재, 치리권의 약화가 낳은 안타까운 모습이다. 그 결과, 무력한 교회로, 전혀 영향력이 없는 식물교회로 전락하였다고 결론하면 지나친 것일까? 교회마다 권징을 시행하지 않는 구실이 하나 있기는 하다. 시벌하면 회개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바로서는 것이 아니라 즉시 교회를 떠나서 가장 가까운 교회로 옮겨 등록하면 그런 자라도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판국이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니 어찌 권징이 서고 교회의 거룩 성을 담보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권징을 시행하는 치리회의 대표자인 목사조차 상회의 권징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 치리회의 적법한 권징 절차(교회재판)에 따라 제명을 당하거나 목사로서 사형선고와도 같은 면직을 당하였을 경우 근신하고, 회개하여 시벌한 노회의 인정을 받으면 복권(복직)의 절차를 받든지 그럴 수 없다면 목사의 일을 포기하여야 하는데 살며시 다른 노회로, 다른 교단으로 교적을 옮겨가서 숨어버리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처신을 하는 그런 위인도 있단다. 세월이 지나면 다 묻혀 버리고, 시간이 지나가 버리면 그만이라는 어설픈 생각이 교회를 병들게 한다는 생각을 왜 못하는지 모르겠다. 교회의 순결과 거룩 성은 처녀성처럼 지켜져야 한다. 교단의 총회가 끝이 났다. 교단마다 권징을 회복하여 참교회의 표지를 찾았으면 한다.

예장개혁 증경총회장, 본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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