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육의 욕망을 위해 악용하지 말라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을 파라오의 압제 밑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전능하신 신으로 믿는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세계화에 의해서 세계민족의 하나님이 되었다. 구약성경의 흐름은 보잘 것 없는 사람을 구원하는 것을 주제로 삼는다. 신약성경 역시 버림받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을 주제로 삼고 있다. 7월은 법의 달이다. 십계명에 나타난 법정신을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하에 있는 한국교회와 세계교회가 구현하고 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십계명에 나타난 생명의 존엄성을 다시 한 번 각인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세계화에 의해서 복음을 받아드린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참사랑, 복음(기쁜소식)을 이 땅에서 실현하고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모두 욕망에 가득 차 탐욕의 바벨탑을 쌓고 있지 않은가(?) 목회자들의 어깨에는 뽕이 들어갔고, 하나님의 참사랑, 복음을 육의 욕망을 위해서 악용하고 있다는 지적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어디에도 버림받은 자를 찾아 나섰다는 교회를 들어본 적이 없다. 십계명은 히브리민족이 바로의 압제 밑에서의 고난을 기억하고, 정의롭고 평화롭게 살라는 하나님과의 계약이다.

구약성경은 분명하게 교육하고 있다. 육의 욕망으로 빚어진 악의 제도 밑에서 억압당하던 떠돌이들이 고난을 통해서 악의 정체를 집단적으로 통찰하고, 집단적으로 끊어낼 수 있었다. 하비루, 떠돌이들은 우리들 속에서 하나님의 영이 평화와 정의의 새 내일을 위해서 몸부림친다. 이 몸부림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과 하나가 되어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상, 새 내일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열었다.

떠돌이들은 바로의 압제 밑에서 해방시키는데 중심에 있었던 모세는 떠돌이들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모세는 떠돌이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삼았다. 이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 이들이 없었다면, 모세 역시 새 내일을 열 수 없었다. 새로운 세상, 새 내일을 위해서는 힘겨운 고난의 터널을 지나야 했다. 이 고난을 통해 떠돌이들은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사실을 믿었고,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세상을 열었다.

애급의 바로에게서 탈출한 떠돌이들이 금방 적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 이들은 40년 동안 광야를 헤맸다. 40년은 가나안 땅에서 정의와 평화의 공동체를 이룩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교육과정이다. 첫째 떠돌이들은 오랫동안 자신들을 괴롭혔던 바벨탑의 악을 알아야 했다. 둘째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서약해야 했다. 셋째 이 일을 잊지 않고 서로 깨우치고 격려해야 했다.

십계명 새로운 나라, 새 내일을 향한 하나님과의 계약
과부·고아·떠돌이 등 서로 축복하며, 평화로운 세상 추구

떠돌이들의 연합공동체

그렇지 않고서는 새로운 나라, 하나님이 직접통치하는 새 내일을 열수 없었다. 분명 모세는 40년의 교육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깨우침으로 하나님과의 계약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모세는 시내산 떨기나무 앞에서 떠돌이, 히브리인들을 모아놓고, 과거와는 단절하고, 새로운 나라, 새 내일을 창출하자는 계약을 맺었다. 그것이 바로 십계명이다.

애급 바로의 압제 밑에서 해방된 떠돌이들을 흔히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생각한다. 단일민족으로 생각한다. 이 떠돌이들은 여러 곳에서 모여든 여러 종족으로 구성된 떠돌이들의 무이이다. 이들은 탐욕과 힘의 철학으로 조성된 악의 바벨탑 아래서 같이 고난을 당한 공통점을 지닌 무리이다. 이들은 육에 의한 욕망으로 만들어진 악을 명확히 보았다. 그리고 새로운 나라, 새 내일을 추구하는 무리들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떠돌이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이들은 야훼의 산 앞에서 새로운 나라, 새 내일을 위한 계약을 맺고, 서로 축복하면서, 평화롭게 사는 생명공동체로 다시 태어났다. 떠돌이들은 애급에서 겪고 거부한 악의 내용은 시내산 앞에서 하나님과 맺은 계약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계약은 생명에 중점을 두고 있다. 고난당하며 산 떠돌이들이 서로를 격려하며,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추구하게 한다.

출애급 공동체는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모시지 않고, 하나님만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온 전통,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과부와 고아 그리고 떠돌이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평화로운 하나님의 나라, 새 내일을 추구했다는 사실은 십계명에 그대로 배어 있다. 이 계약은 오늘날 한국교회를 비롯한 세계교회가 교회법을 만들고, 세상법을 만드는 기초가 됐다.

하지만 이 법을 지키고, 푯대로 삶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 많지 않다. 모두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법을 만들고, 법을 악용한다. 심지어 자신들이 만든 법마저도 지키지 않는다. 십계명을 하나하나 음미해 보면, 애급에서 그들이 겪었던 처절하고 쓰라린 삶의 모습이 명확하게 그대로 묻어난다.

십계명의 서문 너희 하나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에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하나님이다”(출애굽기 202)는 히브리인들과 맺은 계약이 명확해진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은 앞으로 그들을 종살이에서 해방시킨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대로 내포하고 있다.

시내산 떨기나무 앞서 맺은 계약

애급의 바로 밑에서 해방된 떠돌이공동체는 유일신 사상에 도달하지 못했다. 여러 잡다한 신이 있다고 믿었다. 스스로를 현현한 신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을 섬기도록 한 바로 왕도 잡신 중 하나이다. 육의 욕망과 탐욕에 사로잡힌 바로의 밑에서 종살이를 한 떠돌이들에게 무거운 짐이었다. 이 외에도 왕들이 수호하는 신이 있었다. 이 신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수탈했다. 가나안 땅의 영웅신, 농경사회의 말뚝신 등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십계명의 첫 번째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고 했다. 한마디로 어떤 모양으로든지 바벨탑을 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떠돌이들에게 악한 신, 힘을 내세운 잡신으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한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 역시 살아계신 한분의 신,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무당에게 찾아가 길흉화복을 물어본다. 한마디로 잡신을 믿는다. 오늘 한국교회의 일부 목사는 무당이 되어 정치무당, 사회무당과 함께 작두 위에서 칼춤을 춘다.

특히 오늘 한국교회 안에는 교인 위에 군림하며, 교인들의 하나 남은 속옷까지 빼앗는 교주가 얼마인지를 헤아릴 수 없다는 말도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그러면서 이웃교회를 향해 저주를 퍼 붙는다. 이단연구만 수 십 년 동안 해온 최삼경 목사는 천주교는 교주가 하나지만, 개신교는 교주가 몇 명인지 모른다고 과감하게 말한다.

애급에는 우상이 많았다. 이 우상들은 바벨탑에 부속되는 통치자들의 통치 도구였다. 백성들의 자유를 옭아매는 올무였다. 백성들은 우상을 섬겨야 잘산다고 생각했다. 출애급한 히브리인들은 이 광야에서 우상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절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나님과 세상을 함께 섬겼다. 보이지 않는 신을 섬길 이유가 없었다.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것을 거부하고, 세상을 섬기는 종이 됐다. 이것은 떠돌이들에게 무거운 짐이 됐다. 이것은 자유를 얽맨 거추장스러운 짐이었다. 모세는 우상을 섬기는 자신의 백성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드린다.

생명을 사랑하는 하나님은 이런 그릇된 우상으로부터 저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십계명 두 번째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 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는 히브리인들과 계약을 맺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또 한편으로는 강대국 우상과 권력을 섬긴다. 그것은 인간 모두의 마음에 내재된 끝없는 욕망과 탐욕 때문이다.

고대 이스라엘이나,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탐욕을 위해 함부로 악용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탐욕과 욕망을 위해서 내 마음에 바벨탑을 세운다. 하나님의 이름은 눌린자들의 해방과 그들을 평화롭게 하는 일, 그리고 선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 이 외에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통치자들이 하나님을 그들의 수호신으로 만들어서 그들의 바벨탑을 쌓는데 악용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 번째 계명 너희는 너희 하나님의 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고 히브리인들과 계약을 맺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1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일만 하는 노동자들에게 십계명 네 번째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이랫날은 나의 하나님 앞에서 쉬어라, 그 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와 아들 딸 남종, 여종뿐만 아니라 가축이나 집안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이 얼마나 인정어린 지시인가. 이레에 하루를 쉬라고 하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일만하지 말고 생을 즐기라는 것이다.

아들과 띨 뿐만 아니라 가축들도, 떠돌이들도, 종들도 쉬라는 것 아닌가. 삶을 즐기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찬양하라는 것 아닌가. 헌데 오늘날 일부 부자교인은 편하게 교회에 가기 위해 편하게 쉬어야 할 운전기사를 대동하고 교회에 간다. 또한 하나님의 계명을 망각한 교인들은 근로자가 근로시간을 초과해서 일해야 한다는 것에 박수를 보낸다. 이는 분명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네 번째 계명에서 이탈한 행위이다.

1계명부터 네 번째 계명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 철저하게 지켜져야 할 하나님의 지시이다. 다섯째 계명부터 열 번째 계명은 우리가 삶의 현장, 생활현장에서 지켜야 할 계명이다. 먼저 하나님은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야훼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고 지시하셨다. 이 계명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말과 같다.

한마디로 동양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상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부모님을 하나님 섬기듯이 하라는 것이다. 신명기 64-7절의 말씀은 부모의 의무를 교육하고 있다.

,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 뿐이시다/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이것을 너희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들려 주어라. 집에서 쉴 때나 길을 갈 때나 자리에 들었을 때나 일어났을 때나 항상 말해 주어라

히브리민족은 애급에서 종살이 할 때, 그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과도 같았다. 새로 태어난 어린이들은 바로의 명령에 따라 나일강변에 버려졌다. 따라서 부모를 잃은 고아와 남편을 잃은 과부가 그리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다섯째 계명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다. 이는 생명이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그렇다 생명은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생명의 공동체

또한 강자들은 연약한 여성들을 성욕의 대상으로 삼았다. 아브라함이 애급에 들어가면서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한데서 알 수 있듯이, 애급의 성의 횡포’, 강자들의 성문화를 엿 볼 수 있다. 하물며 종의 아내들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따라서 떠돌이들의 아내는 안심하고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위안을 받을 수 있고, 안전한 곳은 가정뿐이었을 것이다. 이를 지켜보는 가장의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며, 일곱째 계명 간음하지 말라는 계약을 히브리인들과 맺었다.

1365일 노동만 한 히브리 노예들은 노동의 열매를 애급인들이 모두 강탈해 갔다. 사람이란 자기 손으로 일한 대가를 먹으며, 삶을 즐긴다. 그런데 애급인들은 히브리 노예들의 노동의 대가를 모조리 강탈해 갔다.

우리민족도 일제 36년 일본의 지배를 받으면서, 노동의 열매를 일본인들에게 모조리 빼앗겼다.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았다. 노예들의 소원은 자기 집에서 살고, 자기가 심은 먹거리를 먹고 사는 것이었다. 엄마는 길쌈해서 가족들의 옷을 지었고, 아버지는 밭을 일구고 나무를 해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졌다.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이들의 이러한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여덟 번째 계명으로 도둑질하지 말라고 했다.

구약의 출애급시대나, 오늘이나 거짓증언을 하는 자는 강자들이었다. 야합 왕의 아내 이세벨은 거짓증언자를 내 세워 나봇을 죽였다. 그리고 그의 포도농장을 빼앗았다(열왕기상 211-16).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거짓 증인을 내 세운 것도 대사제들이었다. 노예생활을 한 히브리인들도 애급에서 거짓증언으로 말미암아 숱한 고생을 했다. 그들 사이에서 결코 같은 악이 재연되어서는 안 된다며, 하나님은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증언 못한다는 아홉 번째 계명을 주었다.

탐욕은 인간을 죽음으로, 아니 죄악과 몰아넣는다. 인간들은 탐욕 때문에 오래된 친구를 버린다. 부모를 살해한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조국도 버린다. 최근 독일 소녀상 앞서 시위를 벌인 그들에게서, 식민지 아래서 고난당한 영성들에 대한 인정이라고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여기에는 한국교회 권사도 끼어 있다. 이들을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말 할 수 없다. 또한 권사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오늘 국민들은 어찌되었건, 일본을 향해서 국교정상화를 하자고 애원하는 군상들을 보면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여기에다 언론은 일본과의 대화를 위해 우리정부가 노력하겠다고 했다고 보도했다. 전정부와의 차별화 방법치고는 수치스럽다.

대한민국 국민은 일본 아베의 경제침략으로 인해 국민은 곤궁한 삶속에서 2년을 보내며, 일본 경제침략에 맞서 일본상품 불매운동을 벌이는 등 일본의 경제침략에 맞섰다. 분명한 사실은, 일본은 한반도를 침략한 국가이다. 대한민국과 동맹을 맺을 수 없는 나라이다. 일본은 한미일동맹을 주장하며, 군국주의 부활을 획책하고 있다. 36년 동안 한반도를 일본의 군화 발에 내준 대한민국의 국민은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다.

약자의 호소를 듣고 행동하는 하나님

악의 근본적인 원인을 뿌리 뽑기 위해 국민은 행동해야 한다. 성경은 탐욕은 만악의 근원이다고 교육하고 있다. 인간은 탐욕 때문에 바벨탑을 쌓고, 너와 그의 것을 빼앗는다. 때문에 하나님은 만악의 근원인 탐심에 대한 엄금을 내린다. 마음의 변화 없이, 탐욕을 버리지 않고서는 참된공동체, 새 내일로 나갈 수 없다. 하나님의 정의롭고 평화로운 공동체에 참여 할 수 없다. 한마디로 탐심을 버리고,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는 미음을 소유해야만 이런 공동체에 참여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열 번째 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네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지 탐내지 못한다고 했다. 약자들을 위한 인정어린 법이 아닌가. 출애굽기 2220-26절은 하나님은 약자들을 보살피는 하나님, 약자들의 아우성 소리를 들으시고 행동하시는 하나님임을 분명하게 교육한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사람을 구박하거나 학대하지 마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붙여 살지 않았느냐/과부와 고아를 괴롭히지 마라/너희가 그들을 괴롭혀 그들이 나에게 울부짖어 호소하면, 나는 반드시 그 호소를 들어주리라./나는 분노를 터뜨려 너희를 칼에 맞아 죽게 하리라. 그리하면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아들은 고아가 될 것이다/너희 가운데 누가 어렵게 사는 나의 백성에게 돈을 꾸어주게 되거든 그에게 채권자 행세를 하거나 이자를 받지 마라/만일 너희가 이웃에게서 겉옷을 담보로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돌려주어야 한다/덮을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없고, 몸을 가릴 것이라고는 그 겉옷뿐인데 무엇을 덮고 자겠느냐? 그가 나에게 호소하면 자애로운 나는 그 호소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약자들이 호소하면 들어주시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일제 36년 식민지 아래서 고난당하는 이 민족의 아우성을 듣고, 해방시켜주셨다. 오늘 부모에 의해서 살해되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하나님은 행동하신다. 하나님은 이집트인을 벌하듯이 약자를 괴롭히는 자들도 벌하시겠다고 하는 것이다. 십계명의 핵심은 생명이다.

십계명의 핵심은 생명이다

강자들이 바벨탑을 쌓지 않고, 고아나, 과부나, 떠돌이, 종들까지도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생명이 넘치는 다민족공동체를 이룩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세 가지 약속을 하셨다. 한마디로 넓은 땅과 창성한 후손, 그리고 민족이 서로 축복을 하는 정의와 평화에 대한 공동체의 실현이다.

가나안 땅에서 해방된 떠돌이들은 애급에서 해방돼 고난당한 종족들의 평화공동체를 이룩했다. 웰터 브르그만은 출애급 공동체의 탄생을 생명공동체의 원형이라고 했다. 심리학자 융의 말대로 출애급 공동체는 알케타입으로 이스라엘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40년동안 광야를 헤매면서도, 십계명을 토대로 해서 가나안에 정착했다. 광야 40년은 이스라엘민족의 연단하는 하나님의 훈련과정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훈련방법이다.

가나안에 정착한 다민족 떠돌이들은 아브라함과 뜻을 같이하여 서로 축복하며, 평화로운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것이 떠돌이들이 바라는 것이었다. 압제자들의 밑에서 신음하는 약자. 강자들에 의해서 이용만 당하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바램이며 소원이다. 오늘 그리스도인, 이 땅에 수많은 교회들은 과연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 내 교회법을 연구하는 단체들이 여럿 있다. 이들 단체가 성경의 법대로 살자고 촉구하는 일은 거의 없다. 안타깝다. 이들 단체는 어떻게 하면, 부자교회의 편에 서서, 부자교회 목회자의 편에 서서 일하는 모습만 보여주었고, 보여주고 있다. 또한 세습을 비롯한 교회 내 갈등에 개입해, 교회의 분란을 더욱더 조장한다. 심지어 자신들이 만든 법마저도 안 지키는 것이 교회이다. 부자교회, 부자교회 목사들에게 끌려 다닌다. 한마디로 참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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