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재 성 교수
김 재 성 교수

4. 최초 새벽기도와 백만명 구령운동

한국교회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기도하는 데 힘쓰고, 예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교회마다 중요한 절기를 맞이하여 기도에 힘쓰고 있다. 특히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신앙을 형성하게 되는 과정을 보면 새벽기도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부흥회와 함께 거의 모든 한국교회가 중요하게 실천하는 생활의 경건한 모습은 새벽기도이다. 초기 선조들의 신앙 유산 가운데서 가장 일상적으로 실행되는 것이 바로 새벽기도 모임이다. 

필자는 한국교회 최초의 새벽기도회가 정착된 프로그램으로 영향을 끼친 소식을 “코리아 미쎤 필드”(The Korea Mission Field)라는 당시 선교사들의 회보 중에서, 1909년 11월호에서 찾았다. 직접 현장에 있는 것처럼 상세히 소개한 스왈론 선교사의 생생한 첫 보고의 글을 접할 수 있었다. 최초 새벽기도회의 감격을 전하여 준 사람은 당시 평양신학교 교수이면서, 마포삼열 (새무얼 모펫) 선교사와 함께 평양에서 사역하던 스왈론 선교사였다. 그 이전에도 특별 성경공부 모임에서 새벽기도를 시행했지만, 정규적인 교회의 집회로 매일 모임을 갖게 된 것은 1909년 가을철이었다.  

1909년, 가을에 접어들면서 평양 장대현 교회 길선주 목사님은 자신의 마음이 차갑게 되었다고 느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고, 냉랭해지며, 열정이 감퇴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미 2년 여 전, 1907년 1월 15일부터 일어난 평양 대부흥 운동의 현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눈물로 죄를 회개하는 성령의 감동을 체험한 바 있었다. 가슴을 쥐어짜면서 통회 자복하던 놀라운 현장을 가장 감동적으로 체험한 분이 바로 길선주 목사였다. 그 평양대부흥 운동은 모든 한국교회를 감동시켰다. 당시 현장을 목격한 선교사들은 앞 다투어서 성령의 불길이 붙었었다고 보고하였다. 그런데 2년이 지난 후에는 차츰 마음이 냉랭해지고 말았다. 

필자는 마포삼열 선교사와 함께 한 길선주 목사의 사진을 볼 때마다, 근엄한 노인을 발견한다. 도교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한 길선주 목사는 항상 삿갗을 쓰고, 흰 도포를 차려입은 점잖은 선비의 모습이다. 그는 이미지는 매우 단호하고 엄격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의 속사람은 전혀 달랐다. 그는 성령의 은혜를 간절히 그리워하였다. 당시 평양 장대현 교회는 출석교인이 약 2-3천명에 도달할 정도로 대부흥을 경험하고 있었지만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서 또 다른 갈망을 품고 있었다. 

길선주 목사님은 마음 속에 사랑이 식어져 버렸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혀서, 새벽 미명에 일찍 일어나서 교회에 나가서 기도를 드렸다. 길 목사님은 가까운 장로님 한 분과 함께 둘이서 열심히 은혜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였다. 두 어 달 동안 기도하는 중에 소문이 퍼져 나가서 다른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아예 새벽 4시 30분에 모두 모이라는 초종을 치고, 5시에 성문이 열려서 통행이 시작하게 되자, 무려 7 백 명의 성도들이 참여하였다. 새벽시간에 모임을 갖게 된 것은 당시에 성문이 열리는 시간과 관계가 있었다. 

길선주 목사님은 다시금 영적인 감동을 회복하기 위해서 회개기도를 주도하였고, 영혼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충만케 되기를 갈망했다. 그냥 습관적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와 새로운 열성을 회복하는 새벽기도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매일 같이 올려지는 기도를 통해서 한국교회는 새 힘을 얻었고, 성령의 역사는 지속되었다. 

이 소식에 접한 서북부 선교사들은 즉각 회합을 가졌다. 이들은 새벽기도회의 전개상황을 전도와 선교의 방법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더구나 스왈론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광고하였다; 

“여러분들의 교회에도 이와같은 문제가 있으면, 길선주 목사님이 하고 있는 이 새벽기도의 방법을 채택하시오”
            
한국의 새벽기도는 이 때부터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고, 기도의 응답을 받는 강력한 은혜의 수단이 되었다.                                

<계속>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