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성 길 목사
권 성 길 목사

어떤 동물이든 집단행동을 하려면 이타심이 필요하다. 하등동물의 이타심이라는 것은 동료들과 떨어지면 불안하고, 같이 있으면 안심되고 하는 정도의 단순한 감정반응일 것이다. 

진화의 계단을 밟아 올라가면서 그런 반응들은 동료의 아픔을 보고 그를 도와주고 싶어 하는 심리적 반응으로 발전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점점 더 정교하고 유연한 형태의 집단행동이 가능해졌을 것이다. 만약 그런 심리적 메커니즘(mechanism)이 없다면 각 개체들은 그저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거나 또는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원시인류와 그 직계조상들의 집단행동이 분업과 협력에 기초하고 있음을 확신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타적인 심정에 의해서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물의 이타심이란 것이 아가패적 사랑일 수는 없다. 그것은 유전자에 의해서 미리 프로그램 된 대로 반응하는 이타심에 불과하다. 인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류의 이타심도 상호주의에 입각한, 잘 아는 사람에 대해서만 작동하는 이타주의이다.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면 화가 난다. 받기만 하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또 친족들로 이루어진 작은 밴드(Band)만이 보살핌의 대상이었다. 그것을 벗어나면 매우 배타적이고 적대적이었다. 자신의 집단만이 善이고 眞이고 우주의 중심이기 때문에 이타심은 그 안의 사람들에 대해서만 작동되어온 것이다.

그 밖의 인간은 적일뿐이다. 대개의 원시 족들이 자기 자신들을 지칭하는 명칭은 그 부족의 언어에서 ‘인간’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들만이 인간이고 나머지는 인간 이하인 것으로 취급된 것이다. 그래서 집단 간에 끊임없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심지어 전쟁포로들은 식량감이 되기도 했다. 

집단사냥은 종족의 사냥터를 수호하려는 본능을 수반한다. 고등한 동물은 모두 영토수호의 본능을 가진다. 특히 사냥하는 동물은 더욱 그렇다. 영토수호의 형태는 사냥의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호랑이 등 개별적 사냥을 하는 동물은 영토의 수호도 개체단위로 이루어진다. 반면 늑대, 사자, 하이에나 등 집단사냥에 의존하는 동물들은 영토의 수호도 집단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이것은 일종의 자연적 형태의 소유권이다). 집단사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인류도 집단적 영토수호의 본능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이것은 다른 집단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의 뿌리를 이루었을 것이다. 

대개의 원시인류는 20, 30명 단위의 사냥밴드를 단위로 해서 유랑생활을 했으며 결혼은 500명 정도의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방언집단’ 내에서 이루어 졌다. 이런 인구의 균형은 종족간 배타성 또는 공격성에 의해서 가능했을 것이다

새세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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