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재 성 교수
김 재 성 교수

한국의 새벽기도는 이 때부터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고, 기도의 응답을 받는 강력한 은혜의 수단이 되었다. 그냥 하는 기도의 습관이 아니었다. 생명이 충만한 현장이었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형제를 사랑하게 되고, 전도의 열심히 일어나는 부흥의 시발점이었다. 무관심과 냉랭함을 씻어버리는 치유와 회개의 역사를 일으켰다. 평양 장대현 교회의 새벽기도 부흥은 마침내 놀라운 결실을 맺게 되었다. 바로 다음 해 1910년, “백만명 구령운동”을 구호로 내세우고 대대적인 전도운동에 열정을 다 바쳤다. 일제하에서 나라를 빼앗기면서 소망이 없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희망을 찾게 되었다. 

은혜는 지속되어야 하고, 심령의 부흥도 계속되어야 한다. 뜨거운 성령의 체험과 은혜를 체험하였지만, 지속적으로 간직하는 것은 쉽지 않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평양은 양국 군인들 수 만명이 죽고 다치는 피바다가 되었다. 약 10년 뒤,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1910년 강제합병을 이루기까지 조선은 무기력한 정치인들로 인해서 불안과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놀라운 은혜를 쏟아 부어 주셨던 것이다.
 
5. 해방 후 혼란과 분열
    
해방의 기쁨과 감격을 맞이한 한국교회는 그 벅찬 희열을 오래 간직하지 못하고 말았다. 해방 직후 한국교회는 조선신학교를 총회신학교로 인준하게 되면서 신학적인 충돌이 발생하고 말았다. 조선신학교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가진 김재준 교수의 주도하에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고, 이에 맞서는 장로회 총회신학교가 1948년 6월 개교하였다. 이 학교의 신학생들마저 성명서를 발표하고, 총회가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진통을 겪다가 1952년 37회 총회에서 김재준 교수를 제명 처분하면서,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졌다. 한국동란이라는 비극적인 동족 상쟁의 와중에서 한국교회는 더 비참한 분열의 고통을 겪었다. 

 둘째는 신사참배를 문제를 회개하면서 교회를 재건하는 방법과 주체를 놓고서 당시 교계지도자들이 서로 갈라서는 교단분열이 일어나고 말았다. 기존의 교회 안에서 개혁하려는 방안과 새로운 교단을 세워서 혁신하자는 주장이 나뉘어졌다. 기성 교단 내에 들어가서 갱신하자는 방안 중에서는 신사참배를 찬성했거나 동조한 목사들과 장로들의 복권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는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1945년 9월 2일, 부산에서 20여명의 목사와 장로들이 교회재건운동을 주도하는 모임을 결성했다. 9월 18일에는 한상동 목사, 주남선 목사 등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경남노회를 재건하였고, 12월 3일 마산문창교회에서 경남노회 제 47회 정기노회가 열렸다. 경남노회는 재건방안을 놓고서 3그룹으로 분열되었다. 

철저한 회개를 부르짖는 한상동 목사를 따르는 자들, 교권주의에 의지하여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김길창 목사를 따르는 자들, 온건 중도파로 분류되던 심문태 목사를 따르는 자들이 각각 나뉘어진 것이다. 

결국 한상동 목사와 한부선 선교사 (Bruce Hunt)를 따라가려는 무리들이 경남노회 안에서 분열하였다. 이미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이라는 체제에 속해있던 인사들은 여전히 기득권을 유지하기를 원했고, 대부분 교회의 지도층은 신사참배와 관련이 있었던 처지였다. 그래서 출옥한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내놓는 복구방안과 회개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를 않았다. 출옥 성도들이 제시한 복구방안은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합당한 권징과 절차라고 생각되어지지만, 그런 정서를 갖고 있는 분들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아직까지도 후손들마저 이 문제에 관해서는 서로 의견을 달리하면서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계속>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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