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재 성 교수
김 재 성 교수

1945년 11월 14일, 박형룡 박사가 다음과 같은 한국교회 재건 방안을 발표하였다. 

1. 교회 지도자 (목사 혹은 장로)들은 모두 신사에 참배하였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 정화한 후 교역에 나갈 일.
2. 권징은 자책 혹은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간 휴직하고 통회자복할 것.
3. 목사와 장로의 휴직 중에는 집사 혹은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할 것.
4. 교회 재건의 원칙을 전국 각 노회 또는 지교회에 전달하여 일제히 이것을 실행케 할 것.
5.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복구 재건할 것. 
 
이 방안이 발표되던 평북노회 등 6개 노회가 교역자들의 모임석상에는 홍택기 목사도 여전히 참석하고 있었는데, 그는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해외에 피난생활을 한 사람보다도, 신사참배의 굴욕을 참아가면서 교회를 지킨 사람이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특히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가진 자들과 교권을 장악한 세력이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총회전체가 배교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회개하고 다시 재출발한다는 과감한 회개운동이 전개되지 못하고 말았다. 세속정권에서도 식민지 지배 세력을 청산하지 못하고, 대한민국 건국 후 이승만 정부시대에 일제 압정에 동조한 세력들이 기득권을 유지하여 명예와 권력과 재력을 차지한 것과 비슷한 형태였다. 

해방되던 해부터 시작된 경남노회의 처리 방안은 한국교회의 회개와 복구방안에 대한 것으로 오랜 시간을 끌면서 총회의 핵심주제가 되고 말았다. 한국장로교회는 해방 이후, 남한 땅에 있는 교회들만의 남부총회를 개최하여, 1947년 제 32회기에 “제 27회 총회에서 결의한 신사참배라는 배교를 취소하는 결의를 하였다. 그러나 1951년 5월 24일, 제 36회 총회에서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교권주의자들이 장악한 총회는 출옥 성도들이 중심되어 구성된 경남노회를 축출하고, 김길창 목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새로운 경남노회를 승인하고 말았다. 

결국은 경남노회가 분열되었는데, 여기에다가 1951년 5월, 교회당 재산을 세상 법정에 고소하여 차지하여야 한다는 입장 (마산 문창교회 송상석 목사를 중심한 마산측)과 반고소 입장 (부산 초량교회 한상동 목사를 중심한 부산측)이 또한 나뉘게 된다. 1952년 4월 29일 대구 서문교회에서 모인 제 37차 총회에서는 경남노회와 고려신학교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이후로 대한예수교 장로회 고신측 총회가 출범하여 장로교단은 1차 분열되었다. 순교신학의 계승은 양분되었고, 정통성을 누가 지키고 있느냐 하는 허울 좋은 명분과 노선투쟁만이 남고 말았다. 

한국교회가 가장 결정적으로 두 교단으로 분열하게 된 것은 1959년 대전에서 모인 장로교회 총회에서다. 평양신학교의 후예들은 서울 영락교회의 한경직 목사가 주도하는 "세계 교회협의회” (World Council of Church, W.C.C.)에 가입하려는 움직임에 동참할 수 없었다
                  
<계속>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