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헌 철 목사
서 헌 철 목사

‘황희’는 어느 편에 서서 일방적으로 정책을 밀어 붙이거나 무조건 반대하지도 않았다. 자기 세력만을 배타적으로 등용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섬세한 저울추와도 같이 국왕과 신료 사이를 오가면서 신구세대의 대립 속에서 중요의 정치를 비켜갔다. 특히 자신과 생각이 다르고 허물이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인재라면 주저하지 않고 기용하곤 했다. 한번은 그가 정승이 처음 되었을 때였다. 마침 김종서도 공판(황희는 종서를 무척 아꼈다.)이 되었는데 공사로 모인 자리에서 종서가 공조로 하여금 약간의 주과를 갖추어 황희에게 올렸다. 그러자 그는 꾸짖어 말하기를 “국가에서 예빈시[禮賓寺 (고려, 조선 시대의 행정기관)]를 정부의 곁에 설치한 것은 삼공을 접대하기 위함이니 만일 시장하다면 의당히 예빈시로 하여금 장만해 올 것이지 어찌 사사로이 제공하였단 말인가?” 하고는 종서를 준열하게 꾸짖기도 하였다.

정승 ‘김극성’이 이 일을 경연[經筵 (왕에게 유교를 가르치던 일)]에서 아뢰고 “대신이란 의당히 이러하여야 조정을 진정시킬 수 있으리라” 하였다. 그 때에 김종서가 여러 차례 병조, 호조의 판서가 되었는데 매양 한 가지라도 실수하는 게 있을 때마다 공이 박절할 정도로 꾸지람을 하되 혹은 종서 대신 종을 매질하기도 하고 때로는 구사[丘史 (관원이 출입할 때 따르는 하인)]를 가두기도 하였다. 그러자 지위의 사람들이 모두 지나친 일이라 하고 종서 역시 군색하였다.

 어느 날 맹사성이 묻기를 “김종서는 당대의 명재상인데 대감이 어찌 그렇게도 허물을 잡으시오” 하였더니, 황희는 “이것이 내가 곧 종서를 아껴서 인물을 만들려는 것이요, 종서의 성격이 고항[高亢(뜻이 높아 남에게 굽히지 않는 것)]고 기운이 날래어 일을 과감하게 처리하니 뒷날에 우리의 자리에 있게 되어 모든 일에 신중히 하지 않는 다면 일을 허물어뜨릴 염려가 있으니, 미리 그의 기운을 꺾고 경계하여 그로 하여금 뜻을 가다듬고 무게 있게 하여 혹시 일을 당해서 가벼이 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요, 결코 곤란을 주려함이 아니오” 하니, 사성도 그제야 심복하였다. 그 뒤에 황희는 물러가기를 청할 때 종서를 추천하여 자기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였다([출처 : 식소록(識小錄) 살기를 탐하고 주기를 두려워하며]

우리는 ‘황희’의 충효는 물론 인애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서, 작금에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에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은 사자나 늑대와 같이 상대방을 사정없이 물어뜯고 찢으며, 자기만이 살겠다고 날카로운 발톱을 더욱 강하게 하는 등, 괴성만 지를 뿐 진정성 있는 모습이라고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러니 대한민국의 미래가 심히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을 진정 애국애족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 모두는 툭하면 “국민이 어떻고.....?”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황희’의 지도를 진정성 있게 받아들인 ‘김종서’, 그들의 관계와 같은 지도자들을 우리 주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인가? 비단 정치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 종교계도 역시 다를 바가 하나 없어 보여 더욱 마음이 아프다. 그러므로 누가 누구를 신뢰하며 어떠한 일이 잘 작동 될 것인가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작금에 벌어지는 일들에서 진정성을 찾아보기가 어려운데 그 무엇을 어찌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지 않은가? 따라서 이제라도 각개 각층의 지도자들은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은혜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숙고(熟考)하며 행동하도록 하자.

(7)대답하여 가로되 왕이 만일 오늘날 이 백성의 종이 되어 저희를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저희가 영영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하나(왕상 12:1-19)

한국장로교신학 연구원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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