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재 성 교수
김 재 성 교수

한국교회가 가장 결정적으로 두 교단으로 분열하게 된 것은 1959년 대전에서 모인 장로교회 총회에서다. 평양신학교의 후예들은 서울 영락교회의 한경직 목사가 주도하는 "세계 교회협의회” (World Council of Church, W.C.C.)에 가입하려는 움직임에 동참할 수 없었다.

한경직 목사는 개인적으로 인품이 훌륭하고,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당대 최고의 목회자였지만, 신학적으로는 평양신학교와는 상관이 없었다. 그는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 유학을 갔다가 돌아와서, 당시 미국 연합장로교회의 입장에 따라서 한국 장로교회 총회를 끌어들이고자 했다. 새문안 교회의 강신명, 용산교회의 유호준 목사 등이 합세했지만, 정작 경기노회에서 총회에 파송하는 총대권을 잃었고, 지지자들을 규합해서 “장로회 신학대학”으로 분리하였다. “총회신학교” (훗날 총신대학교)의 박형룡 박사를 비롯해서 서울 평안교회의 김윤찬 목사, 서울 혜성교회의 박찬목 목사, 청암교회 이환수, 광주중앙교회 정규오 목사, 부산 새중앙교회 노진현 목사 등은 평양신학교의 신학사상을 지켜내고자 W.C.C. 가입에 반대하였다.  

결론

우리가 가진 신앙은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으로 주신 선물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자신의 생활 속에서 체험하면서 성숙하기까지에는 여러단계의 성화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은 그냥 하루 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기도의 눈물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나를 위해서 간구를 올린 결과이다. 그리고 누군가 찾아와 복음의 말씀을 전해 주어서 내게 전파된 것이다 (롬 10:17). 그래서, 한국 땅에서 내가 교회를 통해서 배우고 터득한 믿음의 가르침들은 기초에는 많은 분들의 노고가 담겨있다. 특히, 조선시대에 척박한 땅을 향해서 찾아온 초기 선교사님들의 노고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한국에 전해진 초기 장로교회의 신학이 어떤 뿌리에서 나온 것인가를 조사하면서 놀랍게도 내가 알던 것 보다 더 큰 수고와 희생이 담겨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국 땅을 찾아와 복음을 전해준 수 백명의 초기 선교사들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새롭게 갖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다 자기 나라에서도 출중한 엘리트들이었다. 내가 교회에서 배운 신앙은 그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조선 땅을 찾아온 선교사들이 가르쳐주면서 풀어준 것이다. 내가 성경을 읽으면서 배우는 중요한 가르침들은 개신교 신학자들이 연구하고 토론하여 물려준 것이다. 

우리 한국에는 1884년 복음이 들어왔는데, 피로 물들이는 민족사의 비극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 후 십 여년 동안은 암흑기였다. 1894년부터 1895년 사이에는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서 청나라와 일본이 전쟁을 벌였다. 조선은 친일파와 수구파로 갈려서 조정에서 쟁투가 일어났다. 흥선대원군이 나라를 흔들고 있을 때에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했다. 이를 진압하려는 친일파가 득세했다. 일본은 한국을 지배하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는 일본이 프랑스에서 가져온 함대기술과 우수한 무기를 내세워서 이겼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고통을 당한 것은 조선의 불쌍한 시민들이었다. 

일제 하에서 풍운에 흔들리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을 무렵에, 1901년 평양 마포삼열 선교사 자택에서 신학반이 시작되었고, 차츰 신학교 체제로 발전되었다. 시카고의 거부 맥코믹 여사가 거금을 보내주어서 학교를 지었고, 이 학교를 통해서 3백여명의 목회자들이 배출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인해서 1938년에 문을 닫았다. 그 때까지 서양의 기준에서 볼 때에는 심히 미약했지만, 열심히 개혁신앙을 남겨준 선교사들이 있었다.
   
<계속>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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