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종 문 목사
원 종 문 목사

광복절을 앞두고 낸시 팰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대한민국 국회를 찾았다. 일본군 위한부 생존자 이용수 할머니가 패로시 의장을 만나게 해 달라며, 국회를 찾았다. 이용수 할머니는 개처럼 끌려 나갔다. 이는 사회적 약자, 평생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시궁창 삶보다도 못한 삶을 산 한 많은 사람을 이웃으로 받아들리지 않은 결과가 낳은 비극이다. 성경은 사회적 약자를 우리의 진정한 이웃으로 받아드린다. 성경은 원수까지도 이웃으로 수렴한다. 

헌데 오늘 한국교회는 사회적 약자를 이웃으로 받아드리지 않는다. 한편에서는 “잘 먹고 잘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성경 레위기19장9-18절은 이웃에게 해서는 안되는 일, 로마서 12장13-23은 이웃에게 악행해서는 안되는 일, 누가복음 6장32-38절는 사회를 보면, 오늘 원수가 내일 친구가 되고, 오늘 친구가 내일 원수가 된다. 우리 대한민국은 북한을 원수로 여긴다. 함께 살아야 할 민족이 아니다. 북한 역시 남한을 원수로 여긴다. 서로 험악한 말을 주고 받는다. 성경은 하나님이 원수를 갚아 주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경 로마서 12장14-21절은 악을 선으로 갚으라고 했다. 그렇다 악을 선으로 갚으면, 그들은 오히려 부끄러워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나라에 참여 할 수 있다. 구원을 받을 수 있다.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는 “얼굴들은 서로 다른 사람을 향한다. 이상적인 사회는 얼굴들이 얼굴을 인격적으로 바라본다. 이런 사회가 유토피아 사회이다”고 했다.

데카르트는 근대 인식론을 태동시켰다. 그의 인식론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다. 데카르트의 인식론에는 타인은 없다. 나만 있다. 히틀러는 장애인과 유대인 6백만명을 학살했다. 히틀러의 집단학살은 히틀러 혼자 하지 않았다. 유럽의 관념이 유대인과 장애인 6백만명을 학살했다. 

‘나’의 존재는 얼굴들을 인격적으로 바라보는 사회에서 찾아야 한다. 인간 모두는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 모두를 타인으로 생각한다. 이것이 분단된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아니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진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오늘 정치권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편 가르기에 열중이다. 한국보수교단연합단체도 편 가르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힘 있고, 돈 있는 목회자는 정치권과 마찬가지로 자신편만 옹호하고, 보호한다. 대리인을 내세워 상대방을 비방하고, 원수로 여긴다. 그러면서 거룩한 목회자처럼 행사한다. 부자 목사로부터 몇 푼 받은 교회지도자는 돈 있는 목사를 교주로 만들어 버린다. 이들에게서 공정과 상식을 찾아볼 수 없다. 이제 한국교회는 내편, 네편으로 갈라져 치유 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오늘 법원이 파송한 변호사 임시대표회장 운영체제에 있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보면, 그것은 극명해진다. 그것은 모두가 얼굴들이 얼굴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성숙한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 원수를 마주보고 이웃으로 받아드리는 믿음, 일그러진 얼굴을 바라보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숙한 믿음이다.                                            

예장 통합피어선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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