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재 성 교수
김 재 성 교수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은 그냥 하루 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기도의 눈물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나를 위해서 간구를 올린 결과이다. 그리고 누군가 찾아와 복음의 말씀을 전해 주어서 내게 전파된 것이다 (롬 10:17). 그래서, 한국 땅에서 내가 교회를 통해서 배우고 터득한 믿음의 가르침들은 기초에는 많은 분들의 노고가 담겨있다. 특히, 조선시대에 척박한 땅을 향해서 찾아온 초기 선교사님들의 노고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한국에 전해진 초기 장로교회의 신학이 어떤 뿌리에서 나온 것인가를 조사하면서 놀랍게도 내가 알던 것 보다 더 큰 수고와 희생이 담겨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국 땅을 찾아와 복음을 전해준 수 백명의 초기 선교사들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새롭게 갖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다 자기 나라에서도 출중한 엘리트들이었다. 내가 교회에서 배운 신앙은 그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조선 땅을 찾아온 선교사들이 가르쳐주면서 풀어준 것이다. 내가 성경을 읽으면서 배우는 중요한 가르침들은 개신교 신학자들이 연구하고 토론하여 물려준 것이다. 우리 한국에는 1884년 복음이 들어왔는데, 피로 물들이는 민족사의 비극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 후 십 여년 동안은 암흑기였다. 1894년부터 1895년 사이에는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서 청나라와 일본이 전쟁을 벌였다. 조선은 친일파와 수구파로 갈려서 조정에서 쟁투가 일어났다. 흥선대원군이 나라를 흔들고 있을 때에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했다. 이를 진압하려는 친일파가 득세했다. 일본은 한국을 지배하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는 일본이 프랑스에서 가져온 함대기술과 우수한 무기를 내세워서 이겼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고통을 당한 것은 조선의 불쌍한 시민들이었다. 

일제 하에서 풍운에 흔들리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을 무렵에, 1901년 평양 마포삼열 선교사 자택에서 신학반이 시작되었고, 차츰 신학교 체제로 발전되었다. 시카고의 거부 맥코믹 여사가 거금을 보내주어서 학교를 지었고, 이 학교를 통해서 3백여명의 목회자들이 배출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인해서 1938년에 문을 닫았다. 그 때까지 서양의 기준에서 볼 때에는 심히 미약했지만, 열심히 개혁신앙을 남겨준 선교사들이 있었다. 초기 교육을 잘 받은 길선주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등이 남긴 순수한 개혁주의 청교도 신앙을 선교사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가진 성경적인 신앙은 결코 하루 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한강의 기적을 낳기까지, 이름 모르는 미국의 성도들이 베풀어준 교회의 구호품들을 받아먹으면서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를 살았던 한국인들은 원조물자들을 받아서 추운 날씨와 보리 고개를 간신히 넘겨서 살아남았었다. 이겨내도록 보내준 사랑의 구제품으로 간신히 일어날 수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된 땅에서 신앙의 초석을 놓기까지 무수한 시행착오를 경험했었다. 우리에게 비록 과오가 많았을지라도 다시 성령의 무한한 위로와 충만을 향해서 희망과 소망으로 나가야만 한다. 모세는 광야에서 사십 년의 세월을 흘러 보내면서, 때로는 무료하고 한심스럽게 갈고 닦아야만 했다. 그는 또 사십 년을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 그래야만 모세 오경과 같은 놀라운 책이 나오는 것이다. 신앙은 때로 가족도 없이 야곱이나 요셉처럼 고난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에 정금같이 빚어지기도 한다. 그저 나온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건과 세월 속에서 되새기고 또 반복하면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한층 한층 다져지는 것이다. 성령의 위로와 말씀의 감화하시는 은혜가 오늘도 한국 성도들의 회개기도에, 특히 새벽기도회에 함께 하고 있다. 

<끝>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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