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장로교총회가 시작됐다. 올 장로교총회는 종교적 관용을 통해 교단 간, 교회 간, 연합단체 간의 심화된 분열과 갈등의 시대를 마감하고, 통합과 화합의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진 한국교회는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만 새로운 세상, 새로운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열수 있다. 새 내일로 나갈 수 있다. 또한 코로나19, 홍수와 태풍으로 고난을 당하는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총회로 거듭나야 한다.

교파간의 관용이 절실한 시대

당시 성직자들은 천상의 삶만을 강조하며, 기독교가 타락의 길을 걷게 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상의 삶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정치, 경제, 사회생활 모두가 종교에 예속될 수밖에 없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후 교단간의 다툼이 일어나자 평신도신학자들이 종교적 관용, 정치적관용을 강하게 제기하고 나섰다.

사실 중세시대 계시종교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교리화, 제도화되고, 그 주도세력들인 성직자들이 권력의 중심에서 권력투쟁에 몰입함으로써 타락하기 시작했다. 성직자들은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예수님을 교리화, 제도화 시켰다. 이 때 허버트를 비롯한 아담스미스 등 이신론자들은 전통적 신으로부터의 인간의 자유를 선언하고 나섰다. 이들은 직접적으로 역사에 개입해 들어오는 인격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세계의 운명은 신이 부여한 일정한 법칙을 부여한 하나님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들은 전통적인 신으로부터 인간의 자유를 선언했다. 이들 이신론자의 목표는 신의 본질을 해명하는 것과 함께, 신과 세계의 관계를 규정하는 데 있었다. 이신론자들은 계시종교를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계시종교를 감지하는 것은 마음의 정화를 경험한 사람만이 가능하다고 했다. 마음의 탐욕과 권력욕만이 가득한 오늘 한국교회 목회자와 교인들을 향한 경고로 받아들여진다.

오늘 한국교회는 정치적 관용과 결합된 종교적 관용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모두가 예수님을 교리화, 제도화시켜 정치적인 목회자 모두 그 뒤에 숨어 버렸다.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참사랑(기쁜소식=복음)을 상실했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 종교적 관용이라는 것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다름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만든 교리와 제도에서 벗어나면 이단·사이비로 규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107회 장로교 총회에서 몇 명의 목회자와 교회를 이단의 올무에 덫 씌울지 우려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중세교회의 이신론자들이 자유주의 목표인 개인의 종교적, 정치적 해방을 강하게 제기한 것이다. 교파 간의 갈등으로 인해 신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화형시키고, 죽이는 일이 발생하자, 이신론자들은 종교적 관용과 자유주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개인의 종교적, 정치적 해방에 목표를 둔 자유주의를 선언했다. 인간의 해방은 종교적, 정치적 틀 뿐만 아니라, 경제역역까지도 포괄하는 인간의 자유를 의미한다.

장로교 총회 광경.
장로교 총회 광경.

버림받은 자를 돌보지 않는 교회와 교인 이단의 죄
강대국 우상으로 섬기는 그리스도인 자유서 이탈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는 교회는 이단

중세의 종교적 관용은 전통적인 교리종교와 성직자 중심의 종교에서 교리 때문에 발생하는 갈등과 성직자들의 권력투쟁으로 생기는 싸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신론자들이 제기한 것이다. 사실 중세교회나, 현대교회나, 교리적인 갈등은 계시종교가 내세우는 진리에 대한 절대적 주장에서 발생했고, 발생하고 있다. 여기에서 종교간, 교파간의 관용은 서로 다른 교리와 제도를 인정하라는 것이다. 교파의 다양성, 이웃 교단·교회를 인정하고, 성령 안에서 하나 되라는 것이다.

사실 종교적 관용, 이웃교회와 이웃교단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교회는 분열과 갈등의 역사를 썼고, 분열과 갈등은 만연되었다. 이러한 분열과 갈등은 교회사이, 교단사이, 연합단체사이에서 멈출 줄을 모른다. 특히 모두가 종교적 이념에 갇혀 하나님의 참사랑을 상실했다. 성령을 몰각했다. 성경의 핵심인 이웃사랑을 잃어버렸다. 그렇다보니 오늘 한국교회는 국민들로부터 사이비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오늘 한국교회가 예수님을 교리화, 제도화 시킨 결과, 자유주의의 목표인 개인의 정치적 자유, 종교적 자유, 경제역역에서의 자유는 박탈됐고, 구속됐다. 버림받은 자들의 아우성은 하늘에 사무친다. 부자교회 목사들은 자신들끼리 어울리며, 바벨탑을 쌓는다. 교회 내에서도 부자교인들은 자신들끼리 어울리며, 가난한 교인들을 소외시킨다. 그렇다보니 부자교회 목회자들은 담임목사직을 세습 할 수밖에 없고, 세습은 도미노처럼 일어나고 있다.

이런 교육을 받고, 이런 목회자로부터 설교를 듣고 신앙생활을 하는 부자교인들은 근로자의 쉼의 시간을 거룩한 예배라는 이름으로 박탈하고 있다. 부자교인은 가난한 노동자의 쉼의 시간을 빼앗아 부를 축적하고, 수억원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자랑한다. 목회자는 부자교인이 드린 헌금 위에 축복기도를 해 주며, 교인들에게 교훈으로 삼으라고 거침없이 설교한다. 그렇다보니 목회자와 교인들은 버림받은 자들의 눈물을 닥아 줄 여유조차 없게 됐다. 성서는 분명하게 교육한다. 버림받은 자들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한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자

우리가 죄인인 것은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죄인이다. 버림받은 자를 찾아 나서지 않기 때문에 죄인이다. 잃어버린 자를 나 몰라라 하기 때문에 죄인이다. 버림받은 자를 돌보지 않는 교회가 이단이며, 사이비이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섬기지 않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버림받은 자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이들과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비서트 후프트는 버림받은 자를 돌보지 않는 교회를 향해 경고한다.

가난한 자를 위한 책임을 부정하는 교인이 있다면, 그들은 신앙의 이런저런 항목을 부정하는 것과 똑같이 이단의 죄를 범하는 것과 같다

비서트 후프트의 말은 오늘 하나님의 은사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마음대로 악용하며,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는 한국교회가 이단의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말로 해석된다. 사실 한국교회는 각종 은사를 교인들의 입맛에 맞게 사용해 왔고, 바벨탑을 쌓으며, 맘몬을 위해 악용해 왔다. 기독교는 분명 사랑의 종교이며, 고난의 종교이다. 동시에 희망의 종교이며, 생명의 종교이다. 용서의 종교이며, 관용의 종교이다. 헌데 오늘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현하는 교회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자유라는 이름을 내세워 강대국을 우상으로 섬긴다. 그리고 강대국으로부터 뒤통수를 맞는다.

1968년 세계교회협의회 울살라 세계대회는 인종차별이라고 하는 구조적 인종주의와 가난한 형제를 돌보지 않는 것 역시 이단이며, 따라서 이들을 외면하는 것은 신앙고백의 문제로 규정했다. 인종차별주의자와 같이 사회적 약자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자는 예수님의 길, 그리스도인의 길에서 이탈한 자이다고 선언했다.

갈수록 가난한 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설자리가 없다. 성경은 바벨탑의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다. 또 노아의 홍수이야기도 기록하고 있다. 이 두이야기는 흘러가는 옛날이야기, 동화가 아니다. 노아홍수가 일어난 이후 인간은 홍수가 나더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래서 인간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바벨탑을 쌓았다.

바벨론에 끌려간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문화에 압도당했다. 바벨론의 문화에 비교하면, 유대의 문화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유대민족은 바벨론의 일월성신이 위대하게 보였다. 일월성신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었다. 일제36년을 경험한 대한민국의 정치지도자, 학자, 종교지도자들도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한다. 일본 제국주의 아래서 한민족은 일본의 선진문화에 압도당했다. 한국교회와 일부 정치인, 학자들이 강대국을 우상으로 섬기는 이유이다.

강대국 섬기는 교회가 이단

이러한 정신을 이어받은 이들은 지금도 일제근대화론을 말하며, 코로나19와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국민들은 곤궁한 삶속에서도, 일본의 경제보복에 맞서 싸웠다. 그런데 기독교인 권사는 독일로 건너가 소녀상 철거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날 대한민국 국민도, 독일국민도 분노했다. 이 권사는 국민의 정서와는 관계없이 아베님 잘못했습니다라며, 아베 전 일본총리에게 사과까지 했다. 이들은 한마디로 일제 36년 고난의 역사를 부정하는 인간이다. 오늘도 일본문화에 세뇌된 친일파들이 기승을 부린다. 이렇게 일본운화에 세뇌 당하는 데는 선교초기 영미선교사들이 한몫을 했다.

이렇듯 선교사들은 한국민, 아니 세계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면서, 강대국을 우상으로 섬기게 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유럽을 유토피아로 생각했다. 하지만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유럽이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 유럽의 중세에 지어진 교회들은 거대한 술집, 아니면 박물관으로 변해가고 있다. 심지어 교회당이 이웃종교에 팔려 나가고 있다. 선교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유럽 국가들이 오늘날 왜 이 지경이 되었는가.

한국교회도 유럽교회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였던 아서 브라운 박사는 일본의 선진문화를 한국이 본을 받아야 한다면서, “조선인은 돼지같이 더럽고, 개같이 사납다고 말했다. 이 같은 생각은 아서 브라운 박사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이 같은 선교사들의 생각은 그들의 선교보고서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이들은 비폭력 3.1만세운동에 참여한 한민족,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을 벌인 독립군을 폭도로 매도했다. 또 일본인의 우상 천왕을 섬기도록 하는 일에 앞장섰다. 이러한 사실을 한국교회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역사적인 기록은 이를 부정하지 못하게 한다. 107회 장로교 가을총회는 우상 천왕을 섬긴 잘못, 강대국 유토피아를 선전하기에 바빴던 잘못을 회개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굴절된 역사를 경험한 한국정부는 일본정부를 향해 국교정상화를 애원한다. 일본은 때는 이때다하고, 한국정부를 향해 잘못된 역사, 위안부 문제, 일본징용공문제 등을 바로잡으라고 협박한다. 대한민국의 일부 정치지도자, 친일학자, 일부 기독교인은 강대국 미국과 일본에 영혼까지 팔아버린다. 대한민국 국민에게 미국의 외교정책은 천사처럼 보였다. 오바바는 한국을 농락했고, 트럼프는 깡패같이 굴었고, 바이든은 한국기업으로 하여금 150억불을 투자하게 했다.

미국 바이든 정부는 한국기업을 향해 투자조건을 완화해 주었다. 그러나 미국의 노동자임금이 한국노동자에 비교해서 두 배 이상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한국기업의 적자는 강 건너 불 보듯 뻔하다. 한국기업의 150억불 미국투자는 노동자 30만명의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결과를 가져다가 준다. 그러면서 바이든은 한국의 뒤통수를 때렸다. 미국이 현대전기자동차를 수입하면서, 정부보조금을 못주겠다고 서명했다.

정부, 국가생존전략을 세워라

전기자동차 정부보조금을 둘러싸고 일본, 캐나다, 독일 등이 로비활동을 벌이는 사이, 대한민국 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미국의 전문정보통 모두를 바꿔버려 미국의 속셈을 알아채지 못했다. 현대자동차가 뒤통수를 맞고서야 미국의 악을 보았다. 윤대통령은 미국 하원의장 팰로시가 한국에 왔을 때 무엇을 했는가(?) 국민들은 묻는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어 대한민국은 대한민국만의 생존전략을 세워야 한다. 강대국을 우상으로 섬기는 나라의 고통을 그대로 드러냈다.

우상 천왕을 섬기는 일본은 망해가고 있다. 대한민국 일부 국민과 정치지도자, 한국교회의 일부지도자, 일부학자들은 우상 천왕을 섬기는 일본은 하나님의 진리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진리를 망각했다. 한민족의 역사 속에서 조선 5백년은 독립된 나라였다. 이번 미국의 악에서 보았듯이 오늘 대한민국은 국가생존전략이 없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냈다. 과거만 들춰내기에 바쁘다. 그렇다보니 미래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오늘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다. 청와대도, 정치인도, 학자도, 교회도 제정신이 아니다. 히브리인들은 바벨탑을 보고,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바벨로 알았다. 분명 기술문명의 발달은 허상에 불과하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바벨탑의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 교훈을 깨달아야 한다. 종말의 심판은 예측불가능하다. 때문에 종말은 비참하게 우리를 향해 달려들고 있다.

인간을 지배하는 권력, 세상, 이데올로기 등등은 멸망을 가증하게 한다. 권력자들은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도, 무혐의로 풀려난다. 마가복음 1314-23절은 이들로(가증한 자) 말미암아 미래세대를 꺾어 버리겠다고 경고한다. 선을 가장한 것들이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한국교회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정치권력에 빌어 붙어 있는 자들에 의해 교회는 본래 기능을 상실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이는 그 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그 때에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종말에 그리스도인은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를 알아야 한다. 오늘날 맹목적인 열정, 맹목적인 추종은 교회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다. 심지어 인간을 신으로 만드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사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이단은 맹목적인 추종으로 인해 만들어졌고,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 이들은 이단이라고 하기보다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팔아먹는 사이비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한 것인데, 성경에서 이탈한 교회가 주님의 몸 된 교회라는데 안타깝다.

오늘 강단에서 외쳐지는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빛내기 위한 설교여야 한다. 헌데 오늘 강단에 선 목회자들은 자기자랑하기에 바쁘다. 이것은 설교가 아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선전이다. 예수님은 세상 속에서 버림받은 자들과 함께 하셨다. 버림받은 자와 함께하신 예수님은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리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일하는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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