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변질

세계 곳곳에서 먹구름이 대한민국을 향해 몰려오고 있다. 오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하에서 세계의 가치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대신 맘몬, 돈이 자리를 잡았다. 그렇다보니 오늘날 세계는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는 말이 나온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이 때 그리스도인들은 열정적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신실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충성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

헌데 오늘 한국교회는 돈 때문에 신뢰성이 무너지고, 교회의 정체성이 뿌리 채 흔들리고 있다. 단체장 및 교단장 선거에서의 금품살포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연합단체도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합동측을 비롯한 감리교 등 일부부자교단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교단은 후보 단일화를 이루어 선거 없이 교단장을 선출, 금품선거의 모습은 거의 사라지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교회 내에서 돈을 둘러싼 분쟁은 끝을 보이지 않고 있다. 분열과 갈등을 빚고 있는 대부분의 교회와 교단, 단체는 돈 때문에 분열되고, 갈등을 빚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총연합과의 통합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고 있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역시 회원들이 돈을 둘러싼 이해관계에 얽혀 있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높다. 한기총은 임시총회준비위원회측과, 한교총과의 통합을 찬성하는 측간에 갈등을 빚고 있다.

양측은 적과 동지가 없다. 회원들은 돈의 액수에 따라 움직인다. 오늘은 용인으로 갔다가 내일은 장위동으로 간다. 한기총 일부 회원들이 돈에 따라 움직인다는 얘기다. 분명한 것은 양측 모두 대리전을 벌이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이런 상태로는 한국교회에 희망을 가져다가 줄 수 없다. 분열의 늪은 깊어질 수밖에 없고, 하나의 보수연합기관의 길을 멀고 험하다. 이런 문제는 한기총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사회 전반은 돈이 지배한다.

사실 한국교회는 돈이 있어야 총회장도 되고, 노회장도 된다. 교회의 장로도 된다. 단체장도 된다. 감독도 된다. 모 교단의 총회장은 10-20억을 써야 선거에서 당선된다는 말도 나온다. 감리교 감독회장은 100억을 쓰고도 떨어졌다는 말도 있다. 어느 교회의 장로는 1억원을 헌금해야만 장로가 될 수 있다고 한다. 한기총 역시 대표회장 후보로 나서기 위해서는 기본 수억원을 선거자금으로 써야 한다는 말이 회자된 지 오래다. 돈이 없으면 세습 할 수도 없고, 큰 교회에 부임 할 수도 없다. 교회도 돈이 지배한다.

한기총과 한교총의 통합을 위해서 뿌려진 돈이 10억원이 넘는다는 말도 나온다. 그러고도 양 단체의 통합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사회선거보다도 못한 것이 오늘 교회의 선거이다. 일부 교단에서 후보단일화 시도가 일면, 일부 총대들은 재미가 없다고 말한다. 선거도 축제인데 부자교회 목사가 돈을 쓰는 것이 무엇이 문제가 되냐고 반문한다. 이런 상황서 교회지도자들은 교인들에게 공명선거를 말할 수 없다. 교회의 투명한 재정운동도 말 할 수 없다.

하나님나라의 척도는 헌금의 액수(?)
교회·세상 모두 돈의 위력이 작용한다

교회도 돈이 지배한다

한마디로 신자유주의경제체제에서 교회도, 돈에 멍들어 가고 있다. 돈이 교회를 지배한다. 이제 한국교회도 중세교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나라 척도는 신앙심이 아니라 헌금의 액수가 됐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교인들은 헌금을 많이 내야 대접을 받는다. 오늘 한국교회를 움직이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다. (맘몬)이다. 오늘 세계는 IMF를 비롯한 금융이 지배한다. 오늘 미국이 금리를 올리면서, 한국을 비롯한 세계의 금융시장이 휘청거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느 목사는 어느 방송설교에서 철학자가 말하듯이 아는 것(지식)이 힘이 아니고, 율리우스 시저가 말한 대로 군대가 강한 것도 아니다. 처칠이 말하듯이 대통령이 강한 것도 아니다. 오직 돈만이 강하다. 로마의 장군 시저도, 프랑스의 나폴레옹도 사라졌지만, 돈의 위력이 사라진 적은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만 있으면 물질적인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오늘 참담한 한국교회를 대변하는 설교 내용이다. 그렇다 돈이 있어야 총회장과 같은 명예도, 권력도 얻을 수 있다. 돈이 있어야 가난한 자를 돕고, 교회도 짓고, 선교도 할 수 있다.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돈만큼 강한 것은 없다. 하나님이 전능하듯이 돈도 전능하다. 때문에 ’, ‘맘몬이 곧 하나님인 것이다. 즉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리를 으로 대치시킨 것이다.

가난이 죄이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 목회자도 있다. 돈만 있으면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도 살리고, 죽음 앞에 선 환자도 생명을 연장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이나, 그리스도인이나 전지전능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이라고 말한다. 타락해 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참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성서는 분명하게 교육하고 있다. 버림받은 자를 돌보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버림받은 자를 돌보지 않는 것은 죄이다.

이 목사는 설교 마지막에 봉사하는 교회의 교인들도 모두 부자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바란다고 선언했다, 이 목사는 가난한 지역의 교인들이 좌절하고 괴로워하는 것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자가 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친히 경험하게 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가난에 찌든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싶어 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정직한 목회자의 설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설교를 자세히 들여다가 보면, 가난한 사람은 교회를 다닐 수 없다는 말로 들린다. 오늘 맘몬에 길들여진 교회를 대변하는 설교로 들린다. 사실 오늘 대부분 교회의 목회자들은 고난의 십자가를 진 예수님을 말하지 않는다. 축복만을 강조한다. 그렇다보니 !!! 돈의 돈!! 악마의 금전, 하늘나라는 헌금액수라네는 노래까지 불리고 있다. 예수님의 고난의 십자가로는 교회성장을 장담 할 수 없다는 것이 오늘 현장목회자들의 한결같은 목소리이다.

그 결과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 장애인 등 버림받은 자들이 중심이 되었던 교회는 이들이 버렸다. 과거 가난하고 소외된 노동자와 도시빈민들은 종로5가를 찾아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 행동했다. 교회가 이들의 목소리를 외면하면서, 명동성당을 찾았다. 명동성당마저 이들을 버리면서, 조계종을 찾았다. 하지만 맘몬에 길들여진 오늘날 종교단체 모두는 이들의 외침을 외면했다.

더 이상 한국교회 희망 없다

그러면서 기독교를 비롯한 불교 등 종교인 수는 크게 줄어들었다. 기독교는 1989년 교인수 1300만명을 정점으로 줄어들기 시작해 지금은 700. 아니 500만명이라고 말한다. 한국교회가 버림받은 자를 위해서 일하지 않으면, 교회는 예루살렘성전과 같이 돌 하나 남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어린 양 한 마리를 찾아 가시밭길과 벼랑 끝을 헤매였다는 사실. 예수님은 버림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참사랑(복음)을 선포하고, 이들과 새로운 세상,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몰각해서는 안된다.

여기에서 이탈한 한국교회 한마디로 희망이 없다. 일부 대형교회의 담임목사 세습, 일부 목회자들의 윤리적 타락, 교회 내부의 다툼 및 폭력사태가 언론매체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교인들은 물론,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 교인들은 교회의 잘못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스스로 교인이기를 포기한다.

선교초기 개신교회는 새로운 나라를 갈망했던 한민족에게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을 주었다. 또한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나라의 독립과 민족해방이라는 희망을 주었다. 6.25 한국전쟁 이후 우리도 잘살 수 있다는 소망도 주었다. 이러한 개신교회가 오늘 왜 이렇게 참담하게 되었는가(?) 세상 사람과 교인들은 묻고 있다.

어느 주일날 예배 후 일일노동을 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킥 서비스 노동자가 점심식사를 하면서 부목사에게 한국교회 희망 있습니까?”하며, 물었다. 부목사는 한참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교인 한사람이 끼어들어 희망 없습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마지막 희망은 예수님께서 그랬듯이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 교회를 세워야 한다. 그곳은 바로 분단의 현장이다. 그리고 버림받은 찾아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자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모두가 말을 잊지 못했다. 부목사와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렇다 이 대화처럼 오늘 한국교회는 한마디로 희망 없다. 곳곳에서 !!! 돈의 돈!! 악마의 금전소리만 들려온다. 교회마다 하나님의 참사랑을 상실하면서, 재산을 둘러싸고, 담임목사와 원로목사, 세습을 둘러싸고, 담임목사 청빙을 둘러싸고, 담임목사의 이단성을 둘러싸고 다툼이 끊이지를 않고 있다. 이 다툼으로 인해 교인들이 드린 하나님의 헌금은 변호사비 등으로 새어 나가고 있다. 돈 있는 자만이 법적 다툼도 벌일 수 있다.

돈의 위력 어디까지인가(?)

심지어 총회 산하 지교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입장에 있는 총회장은 한쪽 편을 들어 발언해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이에 원로장로회와 시무장로, 교인들은 총회장이 교회의 진상을 물론, 교회 문제해결의 의지를 보이지 않고 교회를 파행으로 몰고 가는 행동이다고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이 지적은 지교회 문제를 해결하려고 의지를 보이지 않는 이 교단의 임원회를 향한 호소로 여겨진다.

이 밖의 교단의 임원들도 마찬가지로 교인들의 뜻을 반영해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 한국교회의 돈의 위력은 국내외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노동법 개악으로 노동자의 절반이상이 비정규직으로 전락했고,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비정규직으로 가난해진 사람들에게 신용카드를 발급해 소비를 진작시켜 경제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 결과 400만명이 신용불량자가 됐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은 잘못으로 국민들의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다. 이로 인해 가난한 사람들과 청년실업자들은 자신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들이 하나님의 전능성을 통해서 부자가 될 수 있다면, 그들은 얼마나 행복하고 돈의 힘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할까.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은, 무능력한 목회자라도 큰 교회 부자 아버지를 만나서 교회를 그대로 물려받으면, 그는 능력 있는 목회자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교회의 능력 있는 부목사와 장로들은 그 앞에서는 고양이 앞에 쥐가 된다.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성실해도 돈이 없으면 상놈이다. 공부를 못하고 근면하지 못해도 돈이 있으면 양반이다. ‘신분이 사람을 만드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요즘 시대는 돈이 사람을 만든다. 푼돈을 받은 정치인은 철장신세를 지지만, 수백억원을 정치자금을 준 기업인들은 자유롭다. 한국교회를 보라. 지금까지 목회자들이 돈을 주고받아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때문에 단체 발전기금을 마음대로 써도 그냥 넘어간다. 그리고 선거 때 1600명의 총회원에게 10억원 이상의 선거자금을 살포하고도 자유롭다. 감독회장 선거에서 어마어마한 금전살포를 해도 누가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법적인 제제를 받지 않는다.

또한 법적 다툼에서 정치적 실세에게 돈을 주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를 않는다. 이단성의 문제가 있는 목사가 이단사이비대책위원들에게 돈만 주면 이단에서 벗어날 수 있다. 돈을 안주면 이단이 된다. 이것이 바로 오늘 중세교회를 닮아가는 한국교회의 모습이다. 이런 모습은 개 교회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장로를 만드는 것도 신앙이 아니다. 돈이다. 아무리 신앙이 돈독하고 오래 동안 교회에 다녔어도 돈이 없으면 장로가 못된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개혁과 변화를 위해서 앞장선다는 한국기독교장로회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동 교단은 교육원 부지에 임대주택을 선축한다고 한다. 이제 교회를 지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그렇게도 배척했던 돈(맘몬)이다. 예수님은 재물(맘몬)과 하나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선언했다. 하나님과 재물이 양립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예수님은 이미 유대교에서 사제들 가운데 돈이 어떤 위력을 가졌는가를 보았다.

교회를 지배하는 것 역시 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624),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누가복음 13-14)

예수님의 선언은 예수님 당시나, 그후 교회의 역사에서 돈을 사랑하는 성직자들에게 비웃음 거리였다. 왜냐하면 교회는 역사적으로 항상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기며, 하나님을 호화로운 성전에 가두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하나님 보다 맘몬을 더 섬기려 한 것이 교회의 역사이다. 오늘 중세교회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한국개신교회를 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교회마다 돈의 소리가 들린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한국교회 곳곳에서 악취가 풍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예수님의 선언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당황스럽고, 염려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새로운 세상, 하나님나라를 갈망하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맘몬에 얽매이지 말고, 신실하게 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마태복음의 선언이 가능한가.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내용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청지기는 주인으로부터 해고를 당했다. 그러자 청지기는 자기 주인에게 빚진자를 불러 채무를 탕감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을 친구로 삼았다.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를 이렇게 준비했다.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누가복음 161-13)

재물과 하나님을 함께 못 섬긴다

이 성경구절에서 청지기는 자신에게 영리한 행동을 했다. 반대로 주인에게는 불리한 행동을 했다. 과거 많은 성서해석자들은 이 비유를 도덕적인 테두리에서 해석하려고 했다. 맘몬과 하나님을 함께 섬기는 기독교회의 입장에서는 당연했다. 그래서 독일의 신학자 드레브만은 이 비유를 비유들 가운데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행위는 과거나, 지금이나 사회통념상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것은 청지기가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자신을 고용해 준 주인을 기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새로운 시대의 전환, 새로운 질서의 도래를 알고, 영리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칭찬해 주었다. 이 비유는 또 맘몬과 하나님을 함께 섬기는 오늘날 한국개신교를 향한 질책이기도 하다. 많은 성직자들이 자신은 무소유자라고 아무렇지 않게 교인들 앞에서 설교한다.

그러나 이들의 내면을 살펴보면,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무소유를 말하면서 교회의 재산을 자신의 이름으로 등기하고, 이를 둘러싸고 다툼을 벌이는 성직자의 모습은 한마디로 이 비유에서 주인을 기만한 청지기와 같은 사람이 아닌가. 그 시대적 전환은 율법과 예언자의 시대는 요한까지이며, 그 뒤부터는 하나님의 복음이 밀고 들어오는 시대이다. 이것을 모르는 바리사이파(유대인)는 이 시대의 전환을 알지 못했고, 전통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렇다 오늘 한국교회는 교회의 재산사용 문제에 있어서 전통적인 도덕적 준거에서 벗어나, 하나님나라의 질서에 대응하는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그리고 호화로운 교회당에서 신(하나님)을 해방시켜야 한다. 맘몬으로부터 자유로운 성직자로 거듭나야 한다. 이 때 비로써 한국개신교는 한민족에게 희망의 종교로 거듭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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