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보 연 교수
장 보 연 교수

칸트는 “인간안의 내적 재판정의 의식이 양심이다”고 했다. 흔히 양심은 마음의 법정이라고 말한다. 칸트의 말은 인간 자신에게 선악의 갈등이 있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판정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양심적이라는 말은 이성적이라는 말이다. 인간이 양심적으로 산다는 것은 합리적으로 산다는 의미한다.

얼마 전 보수적인 어느 목사님은 “목사는 법보다도 양심을 가지고 산다”고 말했다. 이 목사의 말대로 목회자, 종교지도자들의 가장 큰 덕목은 ‘양심’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종교는 분명 인간이 살아가면서, 모자라는 도덕성과 윤리성을 채워준다. 그렇다면 오늘 인간의 도덕성과 윤리성을 완성시켜주는 종교지도자들은 과연 이성적이며, 합리적으로 살고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사회법보다도, 교회법보다도, 우선하는 것이 바로 각자의 마음의 법정인 양심이다. 오늘날 이성과 합리성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흔히 “양심에 화인 맞았다”, 또는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이런 말은 양심의 자명성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생활현장 전반에서 양심적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을 보면, 양심에 대한 회의를 느낀다. 

특히 ‘전의 전쟁’을 일으켜 교회를 혼란과 고통에 빠트리는 일부 목회자들을 보면, 과연 목회자들에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양심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를 교인들은 의문을 갖는다. 이런 교인들은 목회자의 비양적인 행동에 회의를 느끼고, 교회를 떠난다. 스스로 교인이기를 포기한다. 한마디로 목회자에게서 본 받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인간 목사를 믿는데서 온 결과이다. 사실 한국교회의 일부 목사는 무당들이 하는 일을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다. 즉 인간이 바라는 모든 것을 주겠다고 말한다.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책임을 망각한 결과이다. 성경은, 하나님은 무엇을 주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 지키라’, ‘- 하지 말라’고만 한다. 

‘무엇을 주겠다’, ‘무엇을 해결해 주겠다’고 말하는 목회자와 교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그리스도의 자유를 상실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면서, 스스로 판단해서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살도록 하셨다. 그리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했다. 성실과 진정으로 섬기도록 하셨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진정과 성실로 섬기지 못한다. 인간을 섬긴다. 목사를 보고 교회에 나간다. 이들에게는 진정성이 보이지를 않는다. 진정이 없다는 것은 양심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면서, 사람이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했다. 그리고 메일 변화되는 삶을 살았다. 

변화는 새로운 삶, 새로운 세상, 새로운 나라, 하나님의 나라로 나가기 위한 과정이다. 그런데오늘날 교회는 과거에 머물러 미래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목회자 자신의 변화와 갱신이 없으면서, 교인들을 향해 변화되라고 한다. 천상의 삶을 강조하며, ‘천국’만을 말한다. 현실적인 지상의 삶은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중세교회 이후 루터나, 칼빈은 “천상의 삶 못지않게 지상의 삶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교회 부흥사, 영성사역자들은 오늘 마이너스 성장의 현실 속에서, 평양대부흥운동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고 말한다. 널다리교회(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은 회개운동이라고 말해야 옳다.

당시 길선주 목사는 친구가 맡긴 돈의 일부를 마음대로 쓰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모든 것을 교인들에게 공개하고, 회개하는 설교를 했다. 이 때 밀정, 양반 등 평양시내의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며 교회로 몰려들었다. 때문에 평양대부흥운동은 부흥운동이 아니라, 회개운동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렇다 교회는 끊임없이 변화되어야 한다. 갱신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선교초기부터 변화와 갱신을 외쳐 왔다.     

굿-패밀리 대표•개신대 상담학교수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