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창 주 교수
김 창 주 교수

시편 1에서 복인과 죄인, 또는 의인과 악인의 대조는 뚜렷하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복인의 길에는 몇 가지 관문이 있는데 점점 통과하기 어려운 과제가 주어진다. 각각 다른 대상이 등장하여 복인의 길을 노린다. 특히 죄인, 또는 악인의 길에 빠져드는 자연스런 절차를 세 가지 다른 동사로 묘사한 점이 눈에 띈다. 악인의 꾀를 따른다. 죄인의 길에 선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는다. 시인, 혹은 복인이 길을 가다가 겪게 될 유혹의 단계 또는 과정을 소상하고도 논리적으로 풀어낸다. 맨 처음부터 잘못된 길에 철퍼덕 눌러 앉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먼저 시험하는 자의 소리를 듣고 ‘따른다,’ 그 곳에 잠시 ‘멈춘다,’ 결국 그 한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에스컬레이터로 서서히 내려하듯 점점 깊은 수렁으로 빠져든다.

악인/ 죄인의 운명은 1절에서 보듯 단지 유혹하는 자로 머물지 않고 결국 4-6절에서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 바람에 날린다,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결국 멸망한다. 그렇다고 복인의 길이 마음껏 질주할 수 있는 탄탄대로가 아니다. 도중에 부딪힐 수 있는 악인, 죄인, 오만한 이들의 유혹과 덫이 기다린다. 복인이 야웨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읊조리는 것은 유혹의 함정이나 나태한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는 안전장치다. 그는 시냇가의 나무처럼 열매를 맺고 성장과 결실을 맛본다. 4절의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에덴동산(창 2:8; 겔 36:35), 물댄 동산(사 58:11; 렘 31:12), 잠근 동산(아 4:12), 물가의 동산(민 24:6) 등과 유사한 표현으로 푸르게 자라고 생생하게 살아 안정적인 결실을 맺는다는 뜻이다.

악인과 죄인은 견디지 못하고 중간에 바람에 날리거나, 심판을 통과하지 못하여 목표 지점인 의인의 회중에 참여할 수 없다. 낙오이자 실패다. 그들은 화를 스스로 부른 셈이다. 그러나 야웨는 의인의 길을 인정한다. 의인에게 상이 아니라 ‘인정’(עדי)이라니 무슨 뜻일까? 다소 실망스런 결말이며 무엇인지 부족한 느낌이다. 결론 구절에 극명한 의인과 악인의 대조를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 악인들의 멸망에 대비되는 상황이 야웨가 의인의 길을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야웨는 곧 의인의 길을 ‘진심으로 알아주신다,’ 길을 ‘상세하게 알고 계신다’는 의미다. 의인이 가는 ‘길’을 상호교감하며 이해와 친절로 함께 하신다. 그렇다면 의인의 길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그러니 안전하다. 끝까지 완주할 수 있다. 야웨의 든든하고 친밀한 인정이야말로 의인의 행복이다.  

이와 같은 시편 1의 신학과 메시지를 고려할 때 성문서의 서두이며 시편의 ‘표지’로 등장한 점은 살짝 당혹스럽다. 시편 전체를 대표하거나 핵심을 담지 않기 때문이다. 얼핏 보기에도 시편의 경건을 내세울 ‘깊은 곳’의 탄식이나 기원, 또는 하소연이나 절규를 찾을 수 없다. 게다가 시편 1에는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이나 구문도 없다. 그렇다고 찬양이나 서약 등은 물론 흔한 탄원과 환호성도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시편 1이 맨 앞자리에 온 것일까? 그 이유는 오경의 신학과 교훈을 서두에서 강조함으로써 ‘의인의 길,’ 율법을 통하여 시편과 오경을 잇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편 1의 주제가 중요하다. 곧 하나님의 교훈을 중심에 놓는 사상, 곧 토라이다. 토라는 한 사람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것으로서 의인과 악인을 구분할 수 있는 척도이며 의인이 반드시 실천하며 성취해야할 내용이며 목표다. 따라서 랍비 유단은 시편 1이 영예로운 서두를 차지한 것은 ‘시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시’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Midrash Tehillim, 4> 

토라와 시편은 신학적으로 상호보완적이다. 토라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을 걸고 손을 내민 방식이라면, 시편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고 찬양하는 내용이다. 토라의 요약이랄 수 있는 십계명은 ‘하나님 야웨’로 시작하여 ‘이웃’으로 종결된다. 그러나 시편은 (복 있는) ‘사람’에서 (찬미하라) ‘야웨,’ 곧 ‘할렐루야’로 마친다. 즉 토라는 하나님에서 사람을 향하고, 시편은 사람에서 하나님을 바라본다. 한편 토라와 시편의 일관적인 관계는 모세가 죽기 바로 전 강조한 신명기 33장 29절의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구나’가 시편의 서두에서 ‘복 있는 사람’으로 직접 연결된 데서 확인된다. 시인의 시선은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한다.<Sarna, 26> 시편 1이 서시(preamble)가 된 것은 우연한 결과가 아니다. 시편 1의 시작은 토라를 기준으로 삼는 구약성서의 메시지에 논리적 일관성을 확보한다.        
       
한신대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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