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참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

오늘날 흔히 교회다운 교회가 없다”, “교인다운 교인이 없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목회현장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큰 교회만을 추구한다. 그렇다보니 목회자의 입에서는 맘몬과 바벨의 노래 소리가 자유롭게 나온다. 이로 인해 교회의 정체성은 상실해 가고 있다. 특히 한국교회 전체가 하나가 되어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던 과거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내 교회만이 존재한다. 그런 사이 갈수록 작은 교회들은 자립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신종바이러스 감염증 유행을 거치면서 1만 작은 교회가 문을 닫았다는 통계도 있다.

이제 한국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참사랑과 교회의 참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교회는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복음(하나님의 참사랑=기쁜소식)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을 고백하며, 이를 통해 성취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운동에 참여하는 공동체, 아니 정의와 사랑, 생명과 평화의 공동체를 향해 일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신앙공동체이다. 과연 한국교회가 하나님나라 운동인 정의와 사랑, 생명과 평화의 공동체를 위해서 봉사하고 있느냐(?)는 물음에 자유로운가. 이 물음에 대해 한국교회는 분명하게 대답해야 한다. 그리고 행동해야 한다.

교회는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참된 나눔을 실현해야 하는 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예수님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 역사의 현장서 버림받은 자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과연 오늘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삶의 현장서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고 있는가(?)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가 여기에서 이탈하면서, 예수님의 참사랑을 상실해가고 있다.

대부분의 교회가 혼자만 살겠다고 아우성친다. 부자교회들은 떠난 교인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이웃 작은 교회 교인들을 빼앗아 빈자리를 채우기에 바쁘다. 교회의 공동체성이라고는 어디에도 없다. 과거 한국교회는 이웃교회에서 사경회가 열리면 하나가됐다. 이제 한국교회에서 우리라는 말을 찾아보기 힘든 형국이 됐다. 교회 이기주의에 매몰돼 내 교회만이 존재한다.

이로 인해 오늘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목회자들은 나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으로 교회개척에 뛰어든다. 이들의 입 에서 진리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찾아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함에도, 목사의 말에 세뇌되기 일쑤다. 목회자는 훈련된 교인을 통하여 하나님이 된다. 목회자는 어느 순간 교주가 되어버린다. 오죽하면 천주교는 교주가 한명인데 반해 개신교는 교주가 수천 명이다는 말이 나왔겠는가.

그리스도인 끊임없이 진리 찾아 순례자의 길을 걸어야
추수감사절 헌금 미자립작은교회 돕는데 써야

분열의 중심서 화해자 역할에 충실하라

전 한신대학교 교수 박재순 목사는 자신의 저서 예수와 밥상공동체(19881, 도서출판 천지)에서 교회를, 밥상공동체 운동의 실현을 위해 버림받은 자를 위한 민중지향적인 교회와 기존 제도적인 교회로 구분했다. 과연 한국교회가 박 교수의 말대로 교회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예수님의 삶의 현장서 버림받은 자의 교회로서, 하나님의 참사랑을 이 땅에서 실현하고 있는가를 자신에게 자문해야 한다.

작은 교회들은 눌리고 빼앗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함께 나누면서, 이들의 권리와 몫을 찾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이들은 새로운 나라,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몸부림을 치며, 나눔과 섬김의 선교인 예수님의 경제정의를 철저하게 실천해 왔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현존과 교회의 참모습을 찾아 볼 수 있었다. 이런 교회를 민중교회라고 한다. 반면 제도권에 들어간 대부분의 교회는 양적성장에만 급급한 나머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예수님의 삶의 현장서 이탈했다.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성령의 역사가 가난하고, 고난당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성령을 방매한다. ‘성령의 역사’, ‘기복신앙’, ‘하나님의 뜻’, ‘영성’, ‘천국등을 내세워 교회 성장에만 몰두하며, 버림받은 이웃을 외면한다. 결국 이런 교회는 버림받은 자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교회로 변질됐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을 망각했다.

오히려 오늘 한국교회는 교회가 하고 있는 일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 왔고, 생각하고 있다. 사실 한국교회 140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한국교회가 일제하에서 고난당하는 한민족, 해방이후 가난과 질병으로부터 고통당하는 민족, 70-80년대 하루 벌어 하루를 연명하는 노동자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을 때, 교회가 크게 성장했다는 사실. 오늘 한국교회는 이를 몰각하고, 부자들의 눈물을 닫아주기에 바쁘다.

한국교회는 교회다운 교회를 이 땅에 세우지를 못했다. 교회를 찾았던 버림받은 사람들이 교회를 등지기 시작했다. 오늘 도시나 시골 마을마다 교회의 십자가는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아졌다. 하지만 이 십자가들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맛을 잃어버렸다. 이것은 양적으로 팽창한 한국교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 중 하나이다. 특히 신종바이러스감염증 이후, 교인들의 삶은 곤궁해졌고, 작은 교회들은 중대형교회에 교인을 빼앗겨 자립기반을 상실했다.

부푼 꿈을 갖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자가 되어 교회를 개척하고, 온 가족이 하나가되어 전도한 교인은 어느 날 이웃교회 교인이 되어 있다. 신앙이 성숙해졌다고 생각이 들 때쯤, 이 교인은 이웃교회(중대형교회)로 간다. 그리고 중대형교회는 이웃교회 교인을 빼앗아 온 것을 전도했다며, 축제를 벌인다. 이런 교회를 보면서, 작은교회 목회자는 목회에 대해 회의를 느끼며, 과연 하나님은 계신 것인지 자신을 향해 질타한다. 이웃교회(작은교회)의 교인을 강탈하는 중대형교회의 한편에는 또 하나의 우상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 오늘 중대형교회는 입으로 하나님의 참사랑’, ‘성경의 진리’, ‘생명이 천하보다도 귀하다고 말하면서, 더 악한 귀신 일곱이 들어오게 한다. 오늘 한국교회는 서로 격려하며, 존중하는 마음이 없다. 세상 사람과 마찬가지로 보이는 것에 충실하며, 사이즈로 목사를 평가하고, 교회의 크기를 결정짓는다. 그렇다보니 오늘 작은 교회들 중 2700여 교회가 신천지 말씀교류에 참여하고 있는 현실은 무엇으로 변명해야 할까(?)

작은 교회 등진사이, 방황하는 목회자들

이제 하나님의 참사랑(기쁜소식=복음)은 군대를 넘어 경찰서, 교도소 등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다. 하지만 교회의 십자가 탑의 불빛이 꺼지면서, 교인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 한때 한국개신교는 기독교가 국교로 착각할 정도로 기독교인 1300만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교회마다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면서, 사회의 암적 존재인 타락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교회다운 교회가 없다는 애기다. 오늘 한국교회는 기독교를 가장한 이단사이비를 포함해서 교인수가 800만명, 아니 500만명으로 줄어들었다.

오늘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하나님나라 복음인 정의와 평화, 그리고 생명과 사랑을 몰각한 채, 십자가탑을 높이는데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국교회가 바벨탑을 쌓는 사이 교인들의 헌금으로 사채 놀이하는 교회, 하늘의 뜻과 축복 등을 내세워 교인들의 주머니를 사정없이 털어내는 사이비목사, 교인들의 고혈을 짜서 호화로운 교회당 건축, 권력의 주변을 맴도는 참담한 교회의 모습, 반통일적인 교회의 모습 등등은 이 땅의 버림받은 사람들이 가까이 갈래야 갈 수 없게 만든다. 버림받은 사람이 교회를 등지기 시작했다.

이들 교회는 새 내일을 향한 하나님나라운동과 평화적인 민족통일, 사회적 통합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버림받은 사람들과의 사이에 두꺼운 벽만 가로놓이게 하는 원인을 교회가 제공하고 있다. 이미 한국개신교는 사회적 약자들의 눈물을 닦아주지를 못하면서, 많은 교인이 교회를 떠났다. 일부 교인은 교인이기를 스스로 포기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천주교회, 신천지 등으로 넘어갔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중대형교회들이 작은 교회들에 대한 관심을 저버린 사이, 신천지 등이 교회로 파고들고 있다는 증언. 이제 신천지는 자신들이 신천지교회교인이라는 것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당당하게 어려운 교회를 도와주겠다고 한다. 교인들을 보내 전도도 하고, 헌금도 하겠다고 한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작은 교회는 이것처럼 고마운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작은 교회를 버리는 오늘 한국교회의 상황서, 작은 교회가 선택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런 가운데 일부 대형교회가 작은 교회와 함께 하겠다며, 작은 교회 목회자를 초청, 위로하고, 금일봉은 전달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 한국교회는 말씀의 홍수시대로 빠져들고 있다. 그러나 이 말씀 대부분은 단정적인 예수 믿고 천당’, ‘천국’, ‘영적등등으로 채워져 있다. 교인들에게 달콤한 말만 외친다. 분명 설교는 진리여야 한다. 생명과 평화, 정의와 사랑을 외쳐야 한다,

교회는 진리를 찾는 순례자들이 모인 예수님의 몸이다. 그리고 이들의 신앙공동체이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찾아 순례자의 길을 걷는다. 그럼에도 교인들은 목사의 말에 쇠뇌 돼, 인간은 목사의 말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한다. 이들은 진리를 모른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도 상실했다. 분열과 갈등의 중심에서 반통일적, 반사회적인 모습만을 드러냈다.

예수운동, 하나님나라운동

오늘 한국교회는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는 있다. 하지만 예수님과 등진교회가 됐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운동은 이 땅에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정의와 사랑, 평화와 생명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공룡처럼 비대해진 한국교회는 버림받은 사람들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오늘 문을 닫는 교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지적은 이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 사실 한국개신교는 민족적인 문제와 고난당하는 이웃을 외면했던 일제 36년 기간에 교회성장이 정체되는 역사를 경험했다.

당시 한국교회는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민족적인 문제를 몰각하고, 일본국가주의에 쉽게 굴복하며, 교회분열만 일삼았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우상 천황을 섬기는 일본은 망한다는 진리를 망각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교회는 교회성장에만 급급하고, 대형교회당 건축을 위해 경쟁을 벌였다. 사회적 약자들을 돌볼 겨를도 없었다. 그것은 공룡처럼 아니 부자가 된 한국교회가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부와 인적자원을 함께 나눌 수 없었다. 하나 남은 옷까지 빼앗는 세태가 되었다.

한국교회는 부자가 된 나머지 교회당을 부자교인들의 정서에 맞게 맘몬 교회당을 건축하기 시작했고, 목회자는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 눈물을 흘리는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데 급급하고 있다. 이것도 경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데 한국교회의 모순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성장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교회는 민족사의 앞길에 방해가 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민족의 가장 큰 문제인 분단극복을 위해서 얼마나 봉사했느냐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분단극복의 장애가 되면 되었지 분단극복을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를 못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한국교회는 힘에 의한 평화, 로마 팍스, 아메리카 팍스 만을 외친다. 그래서 일부신학자는 세계교회가 세계분단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지난 과거의 일에 대해 회개하고, 세계평화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한국교회도 남북분단의 중심에 있었던 지난날을 회개하고, 분단의 현장에 교회를 세우고,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화해의 마당으로 나가야 한다고 지적한다.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겠다며, 작은교회를 표방했던 현장교회들마저도, 교회가 해야 할 일을 저버렸다. 일부 교회는 한국사회의 경제적 발전과 함께 외국인노동자교회로 탈바꿈 했다. 또한 일부교회는 제도권교회로 편입돼, 기성교회와 똑같은 길을 걷고 있다. 이들 현장교회는 1970-80년대 물질문명의 발달과 함께 타락해가는 한국교회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이들 교회가 하나 둘 문을 닫으면서, 작은 희망마저도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현장교회가 무너지면서, 버림받은 사람들은 어디에도 희망을 걸 수 없게 됐다. 교회마다 경쟁적으로 맘몬교회당을 건축하고, 거대한 교회당을 채우기 위해 이웃교회의 교인을 빼앗는 교인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부인하지 않는다. 교인을 공룡교회에 빼앗긴 교회들은 문을 닫기 시작했다. 신종바이러스감염증 아래서 1만교회가 문을 닫았다. 이렇게 가다가는 10년 이내 한국교회 역시 유럽교회의 전철을 그대로 밟을 것이라고 우려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타락한 유럽 중세교회의 호화로운 교회당은 박물관, 또는 타종교에 팔려 나가고 있다는 사실. 솔로몬이 호화롭게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 솔로몬이 건축한 교회당보다도 두 배 크게 건축한 헤롯의 예루살렘성전도 돌 하나 남지 않았다. 추수감사절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금년도 추수감사절 헌금만큼은 버림받은 사람들과,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작은 교회를 위해서 과감하게 지원하는 것은 어떨는지(?) 기대해 본다.

그리스도인 끊임없는 진리 찾아 나서야

예수 그리스도는 부자와 가난한 자, 부자나라와 가난한나라, 보혁 대결의 구도에서 화해자, 중재자로 오셔 복음의 자유, 사랑의 자유를 선포하며, 정의와 사랑, 평등과 생명의 공동체를 이 땅에서 실현하셨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나라운동인 화해자, 중재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2015년 에큐메니칼 정책협의회에서 사회학자인 오동춘 교수는 한국기독교는 화해의 종교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증오의 종교라고 말해 한국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오 교수는 또 한국교회가 분단극복과 민족화해를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친미반공의 권력에 잘 적응했다고 지적했다. 또 이를 등에 업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가 놀랄 정도로 크게 성장했지만, 한국기독교에 독자적인 신학적 이론과 세계적인 신학자가 없는 것은 기이한 일이라고 꼬집었다. 그렇다 보니 오교수의 말대로 한국교회의 신학자들은 과거 영미 신학자들의 식민지신학과 지배신학, 정통주의 신학, 근본주의 신학의 입장에서 발표한 논문을 놓고, 말장난을 벌이고 있다.

한마디로 민족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한민족의 심성을 몰각한 채, 지배 이데올로기와 식민지신학을 후학들에게 그대로 이식시키기에 바쁘다. 마치 영미의 지배신학과 식민신학이 최고인냥 떠들고 있다. 이는 결국 한국교회의 강단을 굿당아니신당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심지어 기독교 무당과 정치무당, 사회무당이 하나가 되어 작두 위에서 칼춤을 춘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한국교회는 예수 안에서 결단을 해야 한다. 부자청년이 재산이 아까워 예수운동에 참여하지를 못해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받지 못했다는 성경의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죽어서 잔해만 역사적 유물로 남았다.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모습이다. 반대로 삭개오는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성서의 경제정의를 철저하게 지켰다. 삭개오가 생명을 얻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부자가 된 한국교회 역시 변해야 된다. 마음을 비워야 한다. 재산의 반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준 삭개오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벌인 하나님나라운동, 즉 정의와 사랑, 그리고 평화와 화해, 생명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때 비로소 교회를 등진 사람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올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특히 한국교회에 속한 목회자와 교인들은 광활한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버림받은 자의 아우성을 들을 수 있는 청아한 청각을 가져야 한다. 그것도 인간의 입장이 아닌, 하나님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끝없이 진리의 순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사람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세상, 새로운 세상, 새 내일은 활짝 열릴 것이다.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