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창 주 교수
김 창 주 교수

시편 23은 언제 읽어도 감동을 준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그 핵심이다. 한글 번역은 아쉽다. 왜냐하면 본문과 달리 하나님을 3인칭으로 표현하여 시인이 체험하고 고백하는 직접적인 느낌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어는 2인칭 ‘당신’(התא)이다. 한글은 하나님을 경어체로 부르는 전통(?) 때문에 ‘당신’ 대신에 ‘주께서’(the Lord)로 높여 부른다. 하나님을 3인칭으로 고백한다고 해서 시편 23의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시편 23의 역동성이 어떻게 4절에서 절정에 이르고,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감동이 어떻게 증폭되는지 본문의 생생한 느낌을 반감시킨다. 한글 번역이 감정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밋밋해진다는 데 있다.

시인은 1절부터 ‘야웨’에 대한 신뢰가 절대적이다. 다음은 <개역개정> 인용이며 괄호는 원문에 실린 주어를 살린 경우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으리로다(1절)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그가 나를)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2절) (그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그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3절) 

1-3절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줄곧 3인칭으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시인은 평소 알고 배운 바 있는 하나님에 대하여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논리적이며 신학적으로 고백한다. 계속되는 평화롭고 목가적인 분위기가 4절에서는 완전히 달라진다. 시인은 자신의 감정 선을 노출하면서 하나님을 2인칭으로 언급한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삶의 질곡,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난 것이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절).

4절은 시편 23의 절정으로 살펴볼 구문이 여럿이다. 먼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오역이라고 단정하기는 애매하지만 엄격하게 말해서 의역에 가깝다. 히브리어 ‘골짜기’(איג)는 협곡이나 햇빛이 들지 않는 깊은 계곡을 뜻하고 번역에도 문제는 없다. 사실 ‘사망의 음침한’은 한 낱말(תומלצ)로 ‘매우 깜깜한 그늘’(욥 3:5; 10:21; 사 9:2; 암 5:8), ‘흑암의 공포’(욥 24:17), ‘극단적인 위험’(시 44:19; 렘 13:18) 등으로 풀 수 있다. 냉정하게 번역하자면 ‘사망의 골짜기,’ 또는 (등골이) ‘오싹한 그늘진 계곡’처럼 옮길 수 있다. 그럼에도 흠정역은 ‘shadow of death’라고 번역함으로써 히브리어보다 생생한 느낌을 주었다. 이런 경우를 예를 창조적 오독이라고 한다.

4절의 두 번째 변화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다. 곧 ‘여호와’에서 ‘당신’으로 바뀌었다. <새한글성경>은 1-3, 6절을 ‘혼잣말,’ 4-5절을 ‘기도’라는 해설을 달았지만 인칭의 변화를 설명하지 않는다. 인칭의 활용에서 3인칭과 2인칭의 차이는 확연하다. 2인칭은 직접적이고 3인칭은 간접적이다. 2인칭은 시인이 마주하는 대화 상대자라면 3인칭은 직접 대면하지 않는 누군가이다. 서양 언어의 인칭 구분은 비교적 명료하지만 우리말에서는 뚜렷하지 않다. 더구나 우리말의 존대어는 2인칭을 3인칭화하는 경향이 강하다. 예컨대 2인칭 ‘너’를 가족끼리는 형, 누나, 고모, 삼촌으로, 교회에서는 목사, 장로, 집사로, 사회에서는 과장, 팀장, 대표 등처럼 가족관계나 직함으로 부른다. 특히 존칭어미 ‘님’은 둘 사이의 거리감을 더 강화하거나 멀게 한다. 

1-3절에서 시인과 ‘여호와’는 ‘나와 그’라는 관계처럼 직접적 대상이 아니다. 즉 하나님이 목자로서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며 시인의 영혼을 소생시킨다고 노래하지만 알 수 없는 거리감은 여전히 느껴진다. 그런데 4절의 ‘키 아타 임마디’는 시편 23의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주께서 나와 함께’로 직역되는 이 구절은 접속사, 주어, 전치사구로 이루어진 동사 없는 문장이다. 이 짧은 구문에는 놀라운 반전이 숨겨있다. 곧 하나님을 2인칭 ‘아타’(התא)로 부름으로써 직접적인 대화상대로 삼고 동시에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며, 다른 하나는 시간에 메이지 않은 영원자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로써 왜 시편 23이 깊은 울림을 주는지, 왜 많은 신앙인들이 이 시편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시인은 타인의 시선으로 알게 되었던 3인칭의 하나님을 이제는 인격적인 2인칭의 하나님으로 체험하고 인식한다. 시인에게 하나님은 ‘그’가 아니라 ‘아타’(You)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직접 대상인 하나님 ‘당신’의 현존에 확신하며(4절), 풍족해하고(5절) 그곳에서 영원히 살고 싶은 것이다(6절).       

한신대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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