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절, 헌금을 걷는 날로 변질

11월은 감사의 달이다. 오늘 현대인들은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나머지, 성화된 제의적 감사절을 보내지 못하고, 감사절의 의미를 실종시켰다. 감사절은 1년 동안 농사를 지어 가족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 소출의 일부를 떼어 정성껏 하나님께 드린다. 금년도 감사절은 그 어느 해보다도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작은 교회들은 중대형교회의 도움 없이는 풍성한 감사절을 보낼 수 없다.

교회마다 내년도 예산편성에도 비상이 걸렸다. 그래서 금년도 감사절만큼은 중대형교회와 작은 교회가 상생하는 추수감사절이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교인감소와 함께 교회재정이 감소하고 있는 상황서, 처음 소출을 하나님께 드리던 전통의 감사절이 변질될 수밖에 없고, 변질되어 왔다. 한마디로 모이고, 나누고, 즐겨야 하는 감사절은 모자라는 재정을 충당하는 물질적 감사절에 치중되어 있다.

그렇다보니 오늘날 교회에서 물질적 감사에 치중한 나머지 성화된 제의적 물질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농촌교회와 도시의 작은 교회들은 감사절 헌금으로 재정의 30%이상을 충당하고 있는 것도 부인 할 수 없다. 우리의 고유 명절이며, 첫 수확이 나오는 시기인 중추절’(한가위)에 맞춰 감사절을 지킨다는 것 자체가 어렵다. 성화된 제의적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어렵다.

우리속담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있다. 분명 가을은 풍성한 계절이다. 동시에 감사의 계절이다. 한국교회는 청교도의 추수감사절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띠라서 한국교회 안에서 추수감사절 시기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11월 셋째주일에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분명 한국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감사절이다. 첫 멸매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성화된 제의적 물질과는 거리가 먼 감사절이다.

11월 셋째주일의 감사절은 청교도가 미 대륙에 들어가 농사를 짓고, 첫 소출을 하나님께 드린 시기이다. 1년 농사의 첫 수확물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에서는 맥추감사절이 더 큰 의미를 갖는다. 교회재정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한국교회는 가을걷이가 끝난 초겨울에 드리는 감사절의 의미를 크게 둔다. 한국교회의 실정서 그럴 수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오늘 대부분의 교회는 추수감사절을 11월 셋째주일에 드릴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일각에서는 우리 정서와 멋, 그리고 전통과 문화에 가까운 감사절이 되어야만 제의적 감사절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헌금과 관계없는 도시 교회들 중 일부는 우리의 고유명절인 중추절을 감사절로 지키고 있다. 이런 교회들이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나고 있다. 어찌 보면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년 예산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농촌교회나, 작은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조금 안타까운 면이 없지 않다. 특히 교인이 감소하고, 교회의 재정이 어려워지면서, 중추절에 지키던 감사절을 추수가 끝난 11월로 회귀하는 교회들도 있다. 감사절은 1년 동안 농사하는데 비를 주시고, 햇빛을 주시고, 밤과 낮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 말 그대로 제의적 감사절이다.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성화된 제의적 의미가 있다.

감사절 헌금,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나누어야
모자라는 재정 충당하는 날, 물질적 감사의 의미만

감사절 헌금, 교회재정의 30% 차지

한국교회가 지키고 있는 감사절은 한국적 상황을 미루어 보아 가을걷이 끝내고, 얻어진 수확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고, 교인과 지역주민들이 함께 어우러져 하나님께 감사하는 축제의 날로 지키기에 좋은 계절이다.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농촌교회의 경우, 11월 셋째주일을 감사절로 지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강하다.

영미의 전통주의 신학과 근본주의 신학을 그대로 받아드린 한국교회는 미국 청교도의 감사절을 우리의 감사절로 지킬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이들이 말하는 보수신학이고, 보수신앙이다. 한마디로 민족의 고유명절인 중추절에 추수감사절로 지킬 경우, 추수가 빨라 감사헌금이 그만큼 적게 나올 수밖에 없다는 애기다.

농촌교회는 1년 예산의 상당부분을 감사절 헌금에 의존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중추절을 감사절로 지킬 경우, 헌금이 그만큼 작게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한마디로 첫 수확물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제의적 감사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영향을 덜 받는 도시교회의 경우, 추수감사절을 중추절로 옮겨 지키는 교회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오늘 작은 교회와 농촌교회 대부분은 감사절을 모자라는 재정을 충당하는데 큰 의미를 둔다. 사실 작은 교회들은 감사절에 나온 헌금으로 지출하지 못한 교회건축비를 비롯한 교회의 경상비 등을 한꺼번에 지출한다. 감사절을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함께 축제의 한마당을 연다는 것에 대해서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이런 가운데서도 일부 교회는 추수감사절을 이웃과 함께하는 축제로 만들어가기도 한다.

또한 총동원주일이라는 이름으로 지역주민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교회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매우 좋은 현상이다. 농촌의 작은 교회를 섬기는 백승기 목사는 교인 상당부분을 도시교회에 빼앗긴 상황서, 농촌교회의 재정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다. 추수감사절에 나온 헌금이 교회재정의 상당부분을 차지 할 수밖에 없다. 추수감사절을 첫 수확이 나오는 시기에 지키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감사절의 헌금이 빚 청산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추수감사절의 시기를 지금 그대로 지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백 목사의 말대로 오늘 한국교회의 상황서 추수감사절의 시기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1년 동안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농민인 교인들이 축제의 한마당을 열고, 이웃들과 교제와 친교를 나누는 날로 지키면 된다. 오늘날 감사절은 축제의 날이라고 보기 보다는, 모자라는 교회재정을 충당하는 감사절로 변질되었다. 감사절이 축제의 날이라고 생각하는 교인들도 그리 많지 않다.

버림받은 자들과 함께하는 감사절로

한국교회가 미국의 추수감사절에 맞추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추수감사절은 먹을 것이 풍성해, 이웃과 나누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 당연히 축제의 날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감사절은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들고, 장애우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감사절이다. 오늘 코로나19와 마이너스 경제성장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작은 교회들과 상생하는 감사절을 만들자고 중대형교회에 호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중대형교회 중 일부는 작은교회들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목회자를 초청, 선교비와 풍성한 음식을 대접하고, 위로하는 시간을 갖는다. 특히 코로나19 정국서 대형교회들은 작은 교회들에게 필요한 임대료 등 선교비를 지원했다. 임대료지원은 교단적인 차원에서도 지원했다. 어떤 대형교회는 핼러윈데이 희생자를 위해 10억원을 내 놓기도 했다.

예수님은 버림받은 자들의 일용할 양식을 늘 걱정했다. 일부 도시교회는 이날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교회로 초청한다. 교회는 풍성한 과일과 떡을 차려놓고 지역주민들과 잔치를 벌인다. 교인들의 가족도 이 자리에 참석한다. 감사헌금은 불우한 이웃을 위해서 사용한다. 교회는 온 통 축제분위기이다. 1년 동안 노동하며, 소득을 있게 해 준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린다. 감사헌금도 다른 예배 때보다 특별히 많이 드린다.

문제는 이런 교회들이 마이너스 재정이라는 이유로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성서에 나타난 감사절은, 구약성서에서 유대인들은 그들의 민족적 경험과 감사의 축제를 전통에 따라서 지키고 있는 3대 명절. 모두를 감사절이라고 말한다. 과월절은 민족해방에 대한 감사절로 기념하였고, 봄의 맥추절은 첫 열매의 수확에 대한 감사절이었다. 초막절은 1년 중 가장 큰 절기로서 가을에 모든 곡식과 올리브, 포도를 거두어들이는 명절로, 또한 선조들이 40년 동안 장막에서 살며 유랑하던 생활을 기념하는 절기로 지키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의 감사절도 맥추감사절의 의미가 더 크다. 추수감사절은 한국적 상황에 맞게 별도로 정해야 한다. 성서의 감사절은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이나 모두가 민족적인 축제일이다. 또한 성서는 추수한 이후 땅에 떨어진 이삭을 줍지 못하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삭은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감사절도, 240개국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 전체의 감사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화된 제의적 감사절로 지켜야

한국교회는 우리의 문화와 역사와 관계없이 영미선교사들이 정해 준 날짜에 지키고 있다. 그렇다고 성화된 제의적 감사절에 의미를 두는 것도 아니다. 교인들은 이날 특별히 많은 헌금을 드리는 날로 생각하고 있다, 오늘 감사절은 교인들만을 위한 축제의 날이 되고 있다. 그렇다고 옛날처럼 오곡백과를 교인들이 가져와서 나누는 일도 없다. 오직 특별히 헌금을 좀 더 많이 하는 감사절로 변질되었다. 물질적 감사절로 퇴색되었다.

그래서 추수감사절을 한국교회의 상황에 맞게 정해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회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들 목회자들은 감사절을 민족의 고유명절인 중추절에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한다. 그래야만 첫 수확물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들과 함께 나눔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일가친척 모두가 참여하는 감사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감사절은 영미교회가 들어온 이후인 1904년부터이다. 처음에는 장로교가 1110일을 추수감사절로 기념하던 것이, 1914년 교파 초월한 선교부의 합의에 따라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한 것을 기념하는 뜻에서 11월 셋째 주 수요일로 변경되어 지켰다. 그 후에 추수감사절은 수요일에서, 주일로 바꾸어 11월 셋째 주일에 지키게 됐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농업국가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온 민족이 추수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비록 성서적인 추수감사절은 알지 못했어도, 민족 고유의 축제일로 추석 명절을 지켜오고 있다. 또한 모든 고유 절기는 농사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한국교회의 감사절은 우리의 문화와 역사와는 동떨어져서 지켜왔고 지키고 있다. 추수감사절 헌금만큼은 다양한 문화행사 등을 통해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금년도 추수감사절 헌금은 코로나19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 교회를 위해서 사용하자고 곳곳에서 제안한다. 이는 작은 교회와 중대형교회가 상생한다는 점에서 매우 바람직하다. 이는 곧 교회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바꾸어주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는 첩경이 될 수 있다. 올해도 교회마다 감사절예배를 드린다. 하지만, 특히 소외된 이웃, 버림받은 자, 작은 교회들과 함께하는 예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교인 대부분의 바램이다.

또한 한국적 토양에 맞는 추수감사절로 변화시킬 수 있는 시작이 됐으면 하는 목회자와 신학자들도 적지 않다. 감사절은 함께 모이고, 함께 나누고, 함께 즐기는 축제라는 점에서 이 같은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재에 있는 오늘날 세계는 돈이 지배하는 사회가 됐다. 그렇다보니 함께 모이고, 함께 나누고, 함께 즐거워했던 감사절의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다,

처음 성서에 나타난 감사절은, 처음 소출된 물질을 하나님께 드렸다. 신명기에 나타난 감사절의 물질은 레위인, 고아, 과부 등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라고 분명하게 교육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은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서 이들과 나누라는데 있다. 고대 이스라엘민족의 감사절은 함께 모이고, 함께 나누고, 함께 즐거워했다. 그런데 함께 즐거워해야 할 축제, 감사절의 자연성은 소멸되어 가고 있다는데 안타깝다. 자연성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고, 인위적인 이벤트성 축제만 보인다. 성화된 제의적 감사하는 마음보다도, 물질에 관심이 있다.

감사절을 이용해 장사를 하는 것처럼 밖에 보이지 않는다.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벌이는 가을 축제를 보면, 그것은 더욱 극명해진다. 핼러윈데이와 같은 참사가 일어난다. 예수님은 민심이 흉흉하고, 사람들이 떼로 몰려다니던 시대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다. 예수님은 먹을 것이 없는 상황서, 굶주림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성화된 제의적 기적을 일으켰다.

물질에만 눈이 먼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생각할 수 없는 기적이 2천 년 전에 일어났다. 오늘날 기득권을 옹호하는 국회의원들의 정책과 법 발의는 기득권자들을 옹호하는 정책이며, 법이다. 이것은 노동자를 대변한다는 정의당도 마찬가지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함에도, 그렇지 못하다는데 참담하다.

본질적, 근원적 감사 중요

여당이나 야당이나 그저 포지션만 바뀌었을 뿐, 90%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만드는데 매우 인색하다. 이들이 바로 선진국이라고 자처하며, 백성들을 위해서 봉사한다고 말하는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며, 권력을 가진 자들이다. 더불어민주당이나, 국민의힘이나, 정치권 모두가 10%의 기득권자들을 위한 정당이 되어버렸다. 여야 모두가 10%의 기득권자를 위해서 일하겠다고 아우성친다.

모두가 물질에 눈이 어두워, 제의적 감사의 마음을 잃어버렸다. 부자들의 세금을 감면해주겠다는 정치인들의 물질적 성화는 모두가 함께 살아가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가진 자들이 더 가지면서 살아가는 불합리한 세상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 일상생활에서 근원적인 감사는 당연하다. 하지만 본질적, 근원적인 감사는 보이지 않는다. 존재론적인 감사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일상적인 물질적 감사에 매몰되면 될수록 실망 할 수밖에 없다. 존재론적인 감사는 모든 것을 뛰어 넘는 감사이다. 내 뜻과 관계없는 감사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일상에만 감사하며 살면, 뒤틀리는 순간 실망만 느낀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 욕망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선교사들로부터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런데 재산을 물려준 선교사에게 감사하는 교단의 인사들은 없다.

선교사들이 물려준 재산을 사유화시키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에 바쁘다. 이들에게서 근원적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찾아 볼 수 없다. 인간은 슬픔이 있더라도, 불행하더라도,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성육신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정의와 공의를 위해서 봉사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불의는 가까운 사람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사실.

문제는 내 마음에 욕망이 가득차 불의를 보면서도, 눈감아 준다는 것이다. 모든 범죄는 선을 가장해 불의를 저지른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보니 교회는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성육신 하신 하나님을 교주화 시켜, 예루살렘성전에 가두어버린 유대인들과 다르지 않다.

2022년 한국교회는 풍성한 감사의 계절, 추수의 계절을 보낼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풍성한 감사절은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모두 함께 모이고, 함께 나누고, 함께 즐거워하는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감사절은 결코 특정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두가 풍족하게 누리고,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를 하는 날이다. 감사는 성화된 제의적 감사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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