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셋째 주일은 한국교회가 매년 지키는 추수감사주일이었다. 그런데 한해의 농사를 끝내고 그 수확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추수감사절이 어느 때부턴가 한국교회엔 특별헌금을 거두는 날로 그 의미가 변질되고 있음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한국교회의 추수감사주일은 아메리카 신대륙 개척자인 청교도들의 추수감사절과 깊은 연관이 있다. 1620916102명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고난의 항해를 시작했다. 이들이 영국을 떠나 미지의 신대륙으로 향한 건 오로지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함이었다.

두 달이 넘는 긴 항해 끝에 미국 동부 메사추세츠의 플리머스 해안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오랜 항해에 지치고, 병들어 절반 이상이 생명을 잃었다. 그런 고난 속에서도 미국에 정착한 이들은 그 이듬해 농사한 첫 수확을 하나님께 바치는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원주민인 아메리칸 인디언들을 초청해 잔치를 베풀었다. 이것이 미국교회뿐 아니라 국가적으로 지키는 절기인 추수감사절이 된 것이다.

그런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한국 땅에 복음을 전해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교회 선교 초기부터 기독교 절기로 정착했다. 기독교 절기로 뿌리내리기까지 제사 문제 등으로 갈등이 촉발되기도 했으나 유사 이래로 민족 고유의 명절인 한가위, 추석과 유사점이 많아 큰 이질감 없이 전통적인 문화와 융합한 감이 없지 않다.

본래 추수감사절은 한해의 농사가 끝나고 수확을 결산하는 시기에 맞춰져 있다. 미국의 경우는 영토가 넓어 모든 주의 농사가 끝나는 11월 셋째 주로 정해졌지만, 우리도 똑같이 지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더구나 추수감사절과 유사한 우리의 고유 명절 추석이 음력 815, 양력으로 9월 초·중순에 있는 걸 감안할 때 11월 셋째 주로 고정하는 데 따른 논란이 이어지곤 했다.

그러나 시기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한국교회가 추수감사절의 본래의 뜻과 의미를 잘 지키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땀 흘린 한 해 농사의 수확물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이웃과 나누는 의미가 교회 운영에 필요한 헌금을 특별하게 거두는 날로,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절기를 교인들끼리 먹고 즐기는 날로 퇴색시키진 않았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실 산업화시대 이후 대도시에서 추수란 가슴에 와닿지 않는 단어가 된 지 오래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추수의 개념을 농사로 국한하지 않고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시점에서 지나온 날을 되돌아보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보편적인 절기로 그 의미가 바뀌고 있다.

그런데 매일 매일 감사하며 살아야지 꼭 절기로 정해 감사를 강요하는 것과,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교인에게 특별헌금을 거두는 방법으로 고정화한 게 문제라는 지적과 비판이 적지 않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교회가 나눔에는 인색하면서 교인들의 헌금을 거두어 교회 운영비로 쓴다며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하기도 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한국교회는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사회는 거의 일상을 회복했는데 교회의 사정은 그렇지 못하다. 젊은이들이 교회로 돌아오기를 아직도 주저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한국교회가 이미 유럽교회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섬뜩하다.

교회가 교회 자체 유지를 위해 교인을 필요로 한다면 그 교회에는 생명이 없다. 나눔이 없는 교회, 나누되 생색내기가 목적인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다. 이런 교회는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기 전에 교인들이 먼저 등을 돌리게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