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보 연 교수
장 보 연 교수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중략)/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태복음 25장31-41절)

성경은 자극히 자은 자를 돕는 것을 심판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또 지극히 작은 자를 예수님과 동일시하고 있다. 성경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물 한잔을 베푸는 것을 예수님에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물 한잔은 누구나 대접 할 수 있다. 인간은 믿음, 생명, 굶주림, 옥에 가두는 등 생명을 경시하는데서 불행해진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물 한잔을 대접하라는 것에는 인간관계의 회복과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뜻이 담겨있다.

오늘 인간에 의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참사는 인간을 보호하려는 의지가 결여된 결과에서 비롯되었다. 모두가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을 상실했다. 용산 할로이데이 참사도 마찬가지이다. 위 말씀은 부모로부터 아무것도 물려받지 않은 사람, 버림받은 자들이 지극히 작은 자이다. 인간 사회 면면을 살다보면, 모두가 물질에 매몰돼 버림받은 자, 지극히 작은 자를 돕겠다는 의지가 없다. 버림받은 자, 지극히 작은 자는 물 한잔이 절실하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극히 작은 자는 상대적이다. 인간은 자신이 지극히 작은 자이기도 하지만, 작은 자를 도와야 한다. 그것은 인간 모두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 모두는 자신이 잘라서 사는 줄 안다. 성경은 “나보다 못한 사람을 도와주라”고 분명하게 교육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을 이웃과 나누는 자이다. 

세상은 인간을 사회적 지위로 평가한다. 하지만 하나님나라는 흔적 없는 은총으로 평가한다. 하나님의 분별된 심판이 이루어진다. 사람은 누가 염소인지, 양인지, 늑대인지를 구별하지 못한다. 어떤 때는 양으로 보이고, 염소로 보인다. 인간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사람을 보면, 모두가 선한 사람이다. 

야고보서 2장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유익이 없다”고 말한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물 한잔을 건네는 행함을 말하고 있다. 오늘 기독교는 흔히 사랑이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보니 생명력도, 경쟁력도 잃어버렸다. 모두가 위기의식을 느끼면서도, 성경의 나눔과 섬김을 통한 사랑의 선교를 목회현장에서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참사랑을 잃어버렸다. 

이제라도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로마가 갖지 않은 힘을 길러야 한다. 그것은 사랑이며, 예수님의 평화, 샬롬이다. 한국교회는 북한동포를 사랑하고, 평화통일을 노래해야 한다. 그리고 초대교회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초대교회는 로마의 폭정 밑에서 신음하는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박해를 받으면서도 지극히 작은 자를 섬겼다. 

이는 로마의 폭력을 무력화시켰다. 로마는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드렸다. 그리고 로마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단체였다. 고리대금업도 법으로 철저하게 막았다. 오늘 한국교회는 성경으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면서도, 버림받은 자, 지극히 작은 자를 돕는 일에 대해서는 매우 인색하다. 모두가 책임을 회피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3세기부터 교회는 호화롭고 거대한 교회당을 건축했다. 오늘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세계교회의 조직관리에 중점을 둔 교회성장론은 교회를 망쳐놓았다. 교회당의 호화로운 첨탑이 올라가는 사이 밑바닥의 인간들은 절망하고 있다. 교회의 끈끈한 공동체성도 무너졌다.  
       
굿-패밀리 대표•개신대 상담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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