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 니

환한 저녁때였다
눈 속에서 눈을 맞고 있었다
펑펑 내리는 눈은 아니었고
사그락사그락 내리는 눈이었다
눈이 쌀밥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시밥 시밥 시밥
혼잣말로 시밥이란 단어를 되뇌고 있었다
한 끼니가 눈이 부시게
거리를 데워 주고 있었다
이게 다 밥이야 시야
한 알 한 알 잘 익은 밥알들이
모락모락 거리의 사람들이
눈발을 쐬고 있었다
배가 고파 왔고
시가 고파 왔으므로
이마저 한 끼니의 꿈이었다

문 현 미 시인
문 현 미 시인

누가 시인을 꿈꾸는 자라고 했던가. 낮에도 꿈을 꾸는 사람은 밤에만 꿈을 꾸는 사람이 놓칠 수 있는 수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한다.(애드가 알렌 포우) 무릇 시인이라면 밤에도 낮에도 꿈을 꾸는 존재이다. 그만큼 남다른 감수성을 지녔기 때문에 창의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고 그분으로부터 달란트를 받은 시인은 언어로 예술 작품을 창작한다. 

시인이 얼마나 대단한 경제학자인가 하면 최소의 언어로 최고의 예술을 탄생시키기 때문이다. 가성비로는 시인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 날마다 새로운 것을 찾아 무한히 드넓은 세계를 향해 질주하는, 일종의 혁신적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다. 예전의 것을 답습하는 순간, 바로 시의 몰락이다. 멈추면 그 자리에서 썩어 거름이 되는 게 아니라 퇴폐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시적 화자는 사그락사그락 눈 내리는 저녁에 눈을 맞고 있다. 그때 역동적 상상력이 작동하기 시작한다.“눈이 쌀밥 같다는 생각”에 붙들린다. 시인이 아니면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환상이다. 눈이 쌀로 보일 때 “시밥 시밥 시밥”이라는 표현이 탄생한다. 시인이 만든 시어가 세상과 처음 만나는 순간이다. 새말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시밥이라는“한 끼니가 눈이 부시게 거리를 데워 주고”있다는 발상에서 독자의 마음밭이 환히 밝아온다.  

잘 익은 밥알로 그득해진 거리는 따뜻해져 모락모락 김이 오르고 사람들 마음도 훈훈해진다. 시적 화자의 환상적 시선으로 눈이 밥이 되는 뜨신 현장을 목도하게 된다. 다시 현실로 돌아오니 배도 고프고 시도 고프다는 걸 깨닫는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이“한 끼니의 꿈”이라는 세상의 역에 도착하게 된다. 꿈꾸는 자, 그대 시인이 있어서 눈이 밥이 되고 시밥이 되는 신선한 세계에 발을 딛게 된다. 시가 있는 시간詩間에 겨울은 겨울 밖의 계절로 피어난다.  

백석대 교수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