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창 주 교수
김 창 주 교수

시편 2는 대관식에서 낭송되던 제왕시 중의 하나다(시 20, 21, 45, 72, 78, 89, 101, 110, 132). 구성은 1-3, 4-6, 7-9, 10-12절 네 연으로 문학적 균형과 시적 안정감을 동시에 보여준다. 일단 구조적인 면에서 네 연의 적절한 배분이 시편을 견고하게 지탱한다면, 문학적으로는 새 왕이 등극할 때 발생하는 혼란과 질서를 찾아가는 과정을 논리적이며 생동감 있게 전개한다. 한편 신학적으로 야웨가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왕으로 세우고 아들로 삼는다는 ‘하나님 통치’ 사상과 함께 왕의 정체성 및 덕목을 권면하는 두 겹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은 천자(天子), 신의 대리인으로 간주되었다. 대관식은 ‘신의 아들’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고 통치권을 부여하는 행사다. 본문 7절 후반부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시인은 왕에게 야웨의 훈령을 전달한다. <개역개정>은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로 옮긴다. 원문을 따르면 “내 아들 너는, 나는 오늘 너를 낳았다”로 어색하다. 우선 ‘내 아들’(ינב)이 ‘너’(התא)보다 앞선다는 점만 기억하자. 명사 문장이라서 빈 동사를 채워야한다. 문제는 “You are my son”처럼 형식을 갖추면 히브리어 뉘앙스가 밋밋해지고 심지어 앞뒤가 바뀐다는 사실이다. 히브리어 문장을 그대로 따르면 거칠지만 우선 원문을 지킨다. 비슷한 예는 얼마든 들 수 있다. “위로하라 위로하라 내 백성을. 너희 하나님이 말씀하신다”(사 40:1). <개역개정>의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와 비교해보라. 이사야 1-39장에 일관되던 정죄와 심판이 갑자기 40장에서 위로와 소망으로 바뀌는 장면이다. 한글번역은 원문의 분위기 반전을 꾀하지 못할 뿐 아니라 원문의 강조점마저 놓치고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간다. 

히브리어 ‘내 아들 너는’에는 야웨의 정체성과 왕의 관계를 보여주는 구문이다. 대관식 주인공은 당연히 왕이지만 시편 2의 주체는 야웨라는 점이 강조된다. 야웨의 입장에서 ‘나에게서 비롯된’ 아들임을 선언한 것으로 이어지는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는 구절은 논리적인 귀결이다. 그러니 대부분 번역처럼 ‘너는 내 아들’로 옮기면 문장의 주어가 ‘너’가 되어 주체가 완전히 달라지고 만다. 예컨대 2형식 문장의 풀이로 설명할 수 있다. 보통 2형식 문장은 ‘주어+동사+보어’로 구성된다. 원문을 여기에 그대로 대입하면 ‘내 아들’(주어)+‘생략’(동사)+‘너’(보어)가 된다. 동사 없이 활용되는 문장이다. 2형식 문장에서 주어와 보어의 관계는 글자 그대로 보완적이다. 곧 보어는 주어를 보완하여 문장을 완성시킨다. 보어가 주어를 결코 능가할 수 없다. 따라서 ‘내 아들’이 주어이고 ‘너’가 보어로 쓰인 것을 ‘너는 내 아들이다’로 옮길 수 없다. 주객이 뒤바뀌는 번역이 된다. 시편 2에서 ‘내 아들은 너다’라고 밝힌 이유가 있다. 그것은 야웨가 세상을 다스리는 주인으로서 통치의 주권이 ‘내 아들’에게 있다는 강력한 선언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시편 2의 주체는 야웨이며 세상을 통치할 위엄과 권위는 야웨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와 같은 사상은 시편과 구약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시 10:16; 24:10; 84:3; 95:3; 삼상 8:7; 사 43:15; 44:6). 대관식에서 초점은 새롭게 등극하는 왕에게 집중된다. 이렇듯 중요한 행사에서 ‘내 아들’을 앞세운 것은 대관식의 주체가 야웨라고 공표한 셈이다. 이어지는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는 실질적인 출산이라기보다 입양 절차로 볼 수 있다(창 48:5). 하나님의 아들은 신약에서 예수의 세례, 변모산 기사, 부활 등과 관련되어 언급된다(마 3:17; 17:5; 롬 1:4). 야웨는 새 왕에게 ‘기름을 부으며’(2절), ‘거룩한 산 시온에 세우고’(6절), 야웨의 명령을 전한다(7절). 새 왕에게 필요한 덕목과 최종 목표를 제시한다. 

마지막 연(10-12절) 역시 야웨의 말씀으로 세상 왕들에게 미덕을 교훈하며 야웨를 신뢰하라고 권면한다. 곧 지혜와 교훈을 얻는데 게을리 하지 말고 야웨를 경외하며 섬기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야웨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자세히 분석해야 한다. <개역한글>은 흠정역처럼 ‘피하다’ 대신 ‘의지하다’를 택한다. 이 구문에서 전치사 ‘ב’의 활용을 눈여겨봐야 한다. 전치사 ב는 목적어와 하나로 연합되는 일치와 교감 또는 연대와 결속을 통한 온전성과 일체감을 함축한다. 전폭적인 신뢰의 대상을 목적어로 삼을 때 쓰인다(시 9:11; 신 7:6; 사 61:10). 영어 문장 In God We Trust처럼 주어와 목적어 사이의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착 관계, 둘의 친밀성과 신뢰를 나타낸다. 야웨를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의 복’을 누린다. ‘내 아들’은 야웨와 일체감을 갖고 그분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다. 이 세상을 다스릴 왕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며 교훈이다. 
한신대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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