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시작되었다. 성탄절인 1225일까지 4주간을 가리키는 대림절은 세상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들기 위해 성도들이 가져야 몸과 마음의 준비 기간이라 할 수 있다.

교회력에서 대림절은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하신 뜻이 담겨있다. 따라서 대림절을 지키는 교회와 성도들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반성과 함께 새로운 각오로 새 출발을 준비하게 된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는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육신의 겉옷을 입고 탄생하실 때는 왜 그토록 초라하고 볼품이 없는 모습이었을까.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를 위함이라 하더라도 굳이 말구유에서 태어날 필요까지는 없지 않았을까.

그 해답은 인간의 두뇌 범위와 상상력으론 범접할 수 없는 영적 영역에 속해있다. 즉 죄악에 가득 찬 세상을 구원하고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한 대속의 은총에 대한 예시라 할 수 있다.

만약 예수님이 거꾸로 화려한 왕궁에서 태어났다고 가정할 때 당시 유대는 로마의 식민지로 유대인들은 노예나 다름없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는 최소한 왕족이나 로마에 대항할 만한 힘을 가진 상징적인 가문에서 나와야 했다. 그랬다면 예수님을 메시아로 단박에 알아봤을 거고 예수님은 모진 고난 대신 일약 대중 정치가로 유명세를 탔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화려한 왕궁 대신 냄새나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셨고, 권세 있는 가문이 아닌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세상에 오셨다. 더구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은 가난한 목수 신분이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5)는 말씀에 집약돼 있다. 유대를 로마의 식민지에서 해방시키는 것도, 노예와 같은 비참한 생활에서 벗어나 부유하고 풍족한 삶을 누리게 만드는 것도 아닌 오직 죄악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성육신 하신 것이다.

따라서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에게 왕궁은 처음부터 어울리는 장소가 아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에게 부와 권력, 명예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세상에 오신 목적에 걸림돌이 될 뿐이었다.

그런데 이 땅에 교회들은 어떤가. 이런 예수님을 바르게 증거하고 있는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난 후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하신 명령을 따르는 과정에서 복음을 받은 이들에 의해 유기적이고 자생적으로 이뤄진 초대교회의 길을 가고 있는가.

오늘 교회들이 말구유가 아닌 왕궁에서 예수님을 찾고, 가난하고 힘없는 목수의 아들이 아닌 막강한 권력자를 추종하고 있다면 대단히 잘못된 선택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목회자들이 궁전 못지않은 으리으리한 예배당을 건축하는데 몰두하고 서민은 꿈도 못 꿀 고급 승용차를 몰고 호텔을 제집처럼 드나들고 있다면 주님 앞에 부끄러워해야 할 줄 안다.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대림절에 교회마다 세우는 성탄트리의 장식물이 아니다. 트리에 설치한 전구가 아무리 반짝거린들 그 빛이 세상을 밝힐 순 없다. 그런 의미에서 대림절은 한국교회가 뭘 잃어버렸는지, 얼마나 변질되었는지를 깨닫고 처음으로 돌아갈 기회를 주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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