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성탄절이다. 죄인을 구원하러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날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평화의 왕이라 칭한다. 죄악이 가득한 땅에 진정한 평화 샬롬을 선포하신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올해도 변함없이 각 연합기관과 교단들이 성탄 축하 메시지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예수님이 선포하신 평화가 세상에 가득하길 바란다는 희망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런 희망과 기대가 가끔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으니 평화, 은혜, 축복이 넘치길 소망하지만 정작 그런 예수 정신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교회, 교단, 기관이 얼마나 되겠나.

130여 년 전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복음을 들고 이 땅에 상륙했다. 그들은 교회와 학교, 병원을 세우고 전국을 두 발로 누비며 예수의 이름을 증거했다. 낯선 땅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가족을 제대로 돌볼 겨를이 없어 풍토병과 사고로 세상을 떠난 선교사가 한둘이 아니다.

그렇게 하나둘 세워진 교회가 지금은 5만 교회를 헤아릴 정도다. 130년 전에 장로교, 감리교 단 두 개였던 교파 또한 성결교, 침례교, 오순절 등 다양한 교단과 교파가 유입되며 복음 현장의 다양성이 갖춰졌다. 여기까지는 복음의 확장을 위한 순기능이라 하겠다.

문제는 교회의 외형이 커지고 영향력이 증대되면서 소위 교회 지도자라는 이들이 힘을 드러내는 일이 다반사가 됐다는 점이다. 일제 강점기에 교회는 신사참배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 찬성하는 측은 유형의 교회를 지키며 일신의 안위를 누렸지만 반대한 사람들은 순교 또는 옥고를 치르며 가진 모든 것을 빼앗겼다.

이런 문제가 쌓여 8.15 해방 이후 교단에 금이 가는 단초가 됐다. 겉으론 신학 해석에 있어 보수 진보 간의 갈등으로 포장됐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기득권 싸움이었다. 오늘날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장로교단이 생겨난 게 모두 당시 분열의 단추를 잘못 낀 탓으로 돌릴 순 없다. 하지만 첫 분열의 씨앗이 자라 세포분열이라는 무성한 가지를 뻗게 된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누구나 옳고 그름에 대한 기본적인 판단 기준이 있다. 양심과 도덕적 잣대를 말한다. 그런데 교회 지도자들은 그에 앞서 대개 비상한 두뇌와 동물적 감각에 의존해 정치적인 판단을 한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셨는데 교회 지도자들은 부, 명예, 지위, 교권에 탐닉하는 게 일상사가 됐다,

최근 총회를 연 한교총은 한기총과 한교연의 분열 틈바구니에서 대형 교단들과 이들을 따르는 몇몇 교단들이 새로운 연합운동을 하자며 만든 신생 연합기관이다. 그런데 지난 12월 초 열린 총회에서 대표회장 자리를 놓고 벌어진 모습을 보면 과거의 구태 그 재탕 격이었다.

소위 한국교회 대형 교단들을 노회에서는 노회장 자리싸움, 총회에서는 총회장 자리싸움을 한다. 그러니 연합기관에 와서도 배운 고대로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놓고 예수님이 분쟁을 종식하고 평화를 선포하셨다라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성탄절 메시지를 발표한다.

그러니 성탄절에 한국교회가 제 아무리 번지르르한 내용의 축하 메시지를 발표한들 세상이 감동하겠나. 세상은 교회가 무슨 짓을 하는지 다 아는데 정작 교회만 모르는 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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